메뉴 건너뛰기

XpressEngine


      본당주보입니다.

랄리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 

ST. HA-SANG PAUL JUNG CATHOLIC CHURCH 

주임신부: 이동욱 (도마)  

3031 Holland Rd Apex, NC 27502      Tel: (919) 363-0408      Fax: (919) 363-0409

입당송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

제1독서  여호 5,9ㄱㄴ.10-12

화답송

◎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내 영혼 주님을 자랑하리니, 가난한 이는 듣고 기뻐하여라. ◎
○ 나와 함께 주님을 칭송하여라. 우리 모두 그 이름 높이 기리자. 주님을 찾았더니 응답하시고, 온갖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셨네. ◎
○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네. ◎

제2독서  2코린 5,17-21

복음 환호송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말하리라.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나이다. ◎ 

복음  루카 15,1-3.11ㄴ-32

영성체송    

아들아, 네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기뻐하여라.

 


 생명의 말씀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정수용 이냐시오 신부 | 가톨릭평화방송 · 평화신문 보도주간

 

어느 날 작은아들이 집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집을 나가는 과정부터 좋지 않았습니다.

우선 그는 아버지께 ‘재산 가운데 저에게 돌아올 몫’을 달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상속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진행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그는 살아계신 아버지께 자신의 몫을 요구하며 아버지를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대우했습니다.

상속을 챙긴 그는 큰 고민 없이 집을 나갔습니다.

복음은 이 장면을 두고 ‘며칠 뒤에’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고 전합니다.

 

그렇게 그는 한순간에 관계를 닫았고, 모든 것을 챙겼고, 다시 돌아오려는 마음 없이 떠났습니다. 

큰 재산을 챙겨 집을 나간 그는 무엇을 했을까요?

유산을 밑천 삼아 장사하며 열심히 살았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사업은커녕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했습니다. 

애초부터 자신의 몫을 달라 한 것은 건전하고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는 그제야 생각을 바꿉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행동을 반성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가 집으로 돌아가려 마음먹은 이유는 그저 배가 고팠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먹을 것이 많지만, 자신은 돼지들이 먹는 열매로도 배를 채울 수 없었던 것이 이유였습니다.

심지어 그는 아버지께 돌아가 어떻게 말할지도 미리 준비하는 치밀함을 보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작은아들은 예쁘게 보아줄 모습이 없어 보입니다.

최초에 집을 나갈 때의 태도도, 집을 나가서의 행동도, 그리고 다시 돌아오려는 과정도

좋게 이해해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의 마음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을 대놓고 무시하던 아들의 목을 끌어안았습니다.

방탕한 생활로 가진 것을 다 탕진한 아들에게 입도 맞추었습니다.

심지어 잘 준비된 말로 위기를 모면하려는 것 역시 문제 삼지 않습니다.

아무 이유도 없었고, 아무 조건도 달지 않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바로 이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과 같다고 알려주십니다.


사실 우리도 집을 떠나온 기억이 많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하느님의 뜻을 무시했고 유혹에 걸려 넘어진 일들 말입니다.

나중에 후회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지만 또 그만큼 망설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돌아오기만을 바라는 분이란 사실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기에 충분합니다.

돌아가서 멋진 말을 하며 그분을 감동시킬 필요도 없습니다.

심지어 부족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도 전혀 문제 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잔치를 베풀고 한없이 기뻐하시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바로 우리가 죽지 않고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msn035.gif  [생활속의 복음] 

         받고 누리는 것들에 대한 감사부터

             

                              함승수 신부(서울대교구 수색본당 부주임)

작은아들이 아버지께 ‘유산’을 요구합니다.

멀쩡히 살아계신 아버지께 유산을 요구하는 것은 그분을 ‘죽은 사람’ 취급하겠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볼 일’이 끝나면 그분과의 관계를 끊고 제멋대로

살 거라고 대놓고 선언한 겁니다.

너처럼 불효막심한 놈은 호적에서 파버릴 거라고 노발대발해도 모자랄 판에,

비유 속의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자기 재산을 내어줍니다.

 

하지만 아직 그 큰 재산을 제대로 관리할 깜냥을 갖추지 못했던 작은아들은 그

소중한 유산을 금세 유흥으로 탕진하고는 가축이 먹는 사료조차 배불리 먹지 못하고

굶주리는 비참한 신세가 됩니다.

아버지의 품이 자신을 답답하게 구속하는 ‘감옥’이라고 생각해 도망쳤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그동안 편안하고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다 아버지라는 든든한

울타리 덕분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그는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분 곁에서 그분과 함께 사는 것만이 자신이 ‘살 길’이라 믿은 것이지요.

집으로 돌아오는 작은아들을 멀리서 발견한 아버지는 그의 축 처지고 잔뜩 주눅이

든 모습을 가엾이 여깁니다.

작은아들의 우려와 달리 아버지는 한순간도 그를 미워한 적이 없었습니다.

아니, 한순간도 그를 생각하고 걱정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겁니다.

그렇기에 작은아들을 보자마자 버선발로 달려나가 끌어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워준 것은 그가 자기 아들임을 드러내는 행동입니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어’ 죄송스러운 마음에 스스로 종이 되고자 하는 그를

여전히 아들로 대한 겁니다.

 

아버지 가슴에 대못을 박고 떠났던 ‘죄인 아들’이 아버지의 용서와 자비 덕분에

그분께 ‘사랑받는 아들’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는 작은아들에게도 아버지에게도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너무나 감격적인 순간입니다.

죄로 인해 끊어졌던 부자 관계가 믿음과 회개, 사랑과 자비로 다시 이어져 그들

모두가 삶의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 기쁨의 파스카를 기념하고자 흥겨운 잔치를 벌입니다.

하지만 큰아들은 그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아들로서 해야 할 의무를 저버리고 아버지의 귀한 재산을 들어먹은 저 못된 ‘죄인’을

당장 내쫓아도 시원찮은 마당에, 당연하다는 듯 그를 다시 아들로 받아들이고 그를

위해 잔치까지 열어주는 아버지의 처사가 부당하다고 여겨진 겁니다.

그건 동생만 감싸고도는 ‘편애’이자 아버지 곁을 지키며 그분을 위해 종처럼 일한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였기에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집 밖에 서서 씩씩대고 있었지요.

동생은 엄연히 자기 ‘가족’인데 그의 무사귀환을 기념하여 잔치를 여는 것이

그렇게까지 화를 낼 일일까요?

 

그가 화를 내는 이유는 억울함 때문입니다.

몸은 아버지와 함께 있었지만, 그도 동생처럼 아버지를 떠난 삶을 동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생처럼 자기 몫을 요구할 용기가 없어서, 아버지께 혼날까 봐 두려워서 울며

겨자 먹기로 참고 견뎠을 뿐이지요.

그는 아버지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아들로 살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시키는 대로 마지못해 따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아버지는 방황 중에 자기 몫을 모두 탕진한 작은아들보다 자기 몫을 깨닫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큰아들 때문에 더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 큰아들은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를 닮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을 넘치도록 풍성하게 베풀어 주시지만, 우리는 그 사랑의

참된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하느님을 이용해 자기 욕망을 이루려 할 뿐, 내 삶을 따스하게 어루만지시는

그분 자비의 손길을 답답한 억압과 구속으로 여겨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주님과 함께 참된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받고 누리는 것들에 감사할 줄 알아야겠지요.

지금 나는 하느님의 자녀임에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까?

 

msn036.gif [말씀묵상]  

   못난 아들 감싸 안은 아버지, 주님 사랑은 이런 것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살레시오회)

 

렘브란트 ‘탕자의 귀향’ (1661~1669년).

 

복음의 정수(精髓)요 핵심인 탕자의 귀향

하느님의 연인(戀人) 헨리 나웬 신부(1932~1996)가 빛과 어둠의 마술사 렘브란트

(1606~1669)의 걸작 ‘탕자의 귀향’을 접한 후, 깊이 감상하고 묵상하게 된 과정이 정말 흥미롭습니다.

1983년 헨리 나웬이 51세가 되던 해, 시몬이란 친구를 방문했다가, 사무실 안쪽 문에

붙어있는 복사판 그림 한 장을 보게 됐는데, 바로 탕자의 귀향이었습니다.

처음 접했을 때의 강렬한 느낌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자주색 망토를 넉넉하게 걸친 남자가 남루한 차림으로 무릎을 꿇은 소년의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뜨거운 친밀감, 붉은 망토의 온화한 톤, 소년의 겉옷에

반사되는 황금빛, 그리고 두 존재를 한꺼번에 휘감고 있는 신비로운 광채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일찍이 느낀 적이 없는 감동을 주었던 건 무엇보다도 소년의 어깨를 감싸 쥔 노인의 두 손이었습니다.”

사실 헨리 나웬이 탕자의 귀향을 처음 대면했던 시기, 그는 많이 지쳐있었습니다.

미국 전역을 순회하는 강연을 막 마치고 돌아왔던 것입니다.

남아메리카의 비참한 현실과 불의를 청중들 앞에서 폭로할 때까지는 괜찮았습니다.

함께 힘을 모아 세상의 악과 맞서 싸우자고 연단에서 외칠 때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일정이 끝나고 텅 빈 집으로 돌아오자 엄마 치마폭에 매달려 엉엉 울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처럼 나약해졌습니다.

헨리 나웬은 그렇게 탈진해있던 상태에서 탕자의 귀향을 대면한 것입니다.

그림을 보는 순간 그는 만사 제쳐놓고 둘째 아들처럼 아버지 품에 푹 안기고 싶었답니다.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곳, 아버지 집처럼 편안한 곳에서 아무 생각 없이

두 다리 쭉 뻗고 쉬고 싶었습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그는 하버드 대학교 교수직을 미련 없이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캐나다 토론토에 위치한 장애인들을 위한 공동체 ‘새벽’의 일원이 됩니다.

영원한 아버지 집에 대한 그의 간절한 갈망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입니다.

새벽 공동체로 건너가기 전 헨리 나웬은 탕자의 귀향 진품을 관람하기 위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예르미타시 미술관을 방문합니다.

그림 안에는 아버지와 둘째 아들 외에 4명의 인물이 더 등장하는데, 어떤 면에서

그들은 관찰자요 방관자, 구경꾼들입니다.

그는 자신 역시 오랜 세월 동안 관찰자요 방관자, 구경꾼으로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구경꾼이 아니라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합니다.

둘째 아들처럼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그분 품 안에 꼭 안기고 싶어 합니다.

“저도 둘째 아들처럼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은 채로, 그분의 가슴에 귀를 바짝 들이댄 후,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오랜 시간 아버지 심장의 그 박동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습니다.”

탕자의 귀향을 앞에 두고 묵상하던 헨리 나웬은 그 작품이 바로 자신을 위한 것이란

생각이 점점 짙어졌습니다.

하느님이 그에게 들려주시려는 말씀의 핵심뿐만이 그 작품 안에 다 담겨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림 안에 복음의 정수, 핵심, 총 요약이 들어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비로운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탕자의 귀향에 대한 헨리 나웬식 묵상의 결론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우리 안에는 둘째 아들, 그리고 첫째 아들, 최종적으로 아버지, 세 인물이 공존합니다.

탕자의 귀향 스토리는 둘째 아들로부터 시작해서 첫째 아들로 넘어가고,

마침내 아버지에게서 끝납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자비하신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돌아온 탕자를 기쁘게 맞이하는 아버지의 분위기는 참으로 따뜻합니다.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데서 오는 기쁨과 행복이 존재합니다.

죽을죄를 짓고 불안해하는 둘째 아들을 다독여주며 안심시켜주는 모습에서

너그럽고 지혜로운 한 노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에서 주목할 부분이 두 손입니다.

두 손의 크기가 우선 다릅니다.

아들의 어깨에 닿은 왼손은 강하고 억셉니다.

마디마디에 꽤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저 만지는 데 그치지 않고 힘을 주고 강하게 움켜쥐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반면 오른손은 어떻습니까?

부여잡거나 움켜쥐지 않습니다.

귀부인의 손가락처럼 세련되고 부드러우며, 우아하고 다정한 분위기입니다.

손을 사뿐히 올려놓은 듯합니다.

어루만지고 토닥이며 위로와 위안을 주고 있는 어머니의 손입니다.

아버지 안에는 모성과 부성이 함께 공존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면서도 어머니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한편으로는 붙잡아 주시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루만져주십니다.

아버지가 걸치고 계시는 큼지막한 외투 역시 우리의 눈길을 끄는데, 큰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색상이 따뜻하고 고운데다 큼지막합니다.

모양도 아치를 닮아서 깃들이기 좋은 환영의 공간입니다.

세상에 지친 나그네들을 쉬어가게 하는 장막처럼 보입니다.

헨리 나웬은 특별한 표현을 합니다.

“새끼를 품고 지키는 어미 새의 날개를 연상시킵니다.”

결국 아버지의 커다란 망토는 보살핌과 보호 속에 안전하게 쉴 수 있는 아버지의 품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고 우리 공동체는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슴을 치며 집으로 돌아오는 한 존재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극진히 환대하고 있습니까?

괜찮다, 다 괜찮다며 다정히 등을 두드려주고 있습니까?

이제 더 이상 너를 놓지 않겠다는 각오로 그를 꽉 움켜쥐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탕자의 귀향을 감상하고 묵상하며, 나는 과연 돌아온 탕자인가?

아니면 첫째 아들인가? 파악하기 위해 고민합니다.

그러나 렘브란트와 헨리 나웬은 그게 아니라고 외칩니다.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모두 다 자비로운 아버지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해진다는 것은 나이에 상관없이 부단히 둘째 아들에서 첫째 아들로,

첫째 아들에서 아버지로 옮겨가고 변환되어 가는 것입니다.

나이를 꽤 먹은 헨리 나웬의 고백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노년기를 살아가는 분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갈 것입니다.

“나이 들어 쪼글쪼글해진 내 두 손을 바라봅니다.

이제는 알겠습니다.

이것은 고통을 당하는 모든 이들에게 내밀라고, 집을 찾아온 모든 이들의

어깨에 내려놓으라고, 하느님의 그 어마어마한 사랑에서 비롯된 축복을 베풀라고

주님이 주신 손입니다.”(헨리 나웬의 「탕자의 귀향」(포이에마) 참조)

 

 

msn008.gif  [음악] 

        바흐 <마태수난곡 BWV 244> 중
                  ‘불쌍히 여기소서(Erbarme dich)’

                      임주빈 모니카 | KBS프로듀서


이 영화는 20세기의 가장 예술적 감독이라는 평을 받는 망명한 옛 소련의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 1932~1986)의 마지막 작품

<희생>이라는 영화입니다.

영화는 이해하기 어려웠고 더러 눈을 감은 터라 얘기를 꺼낼 입장이 못 되지만,

한 가지, 이 영화 시작과 말미에 화면 가득 흐르던 바흐의 <마태수난곡>의 아리아는 두고두고 기억이 납니다.
 

위대한 작곡가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독일)는 아시다시피

수많은 교회음악을 써서 주 하느님을 찬미했습니다.

그의 교회음악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곡이 <마태수난곡 BWV 244(바흐작품번호 244)>입니다.

이 곡은 1727년 4월 11일, 바흐가 음악감독으로 있던 성 토마스 교회의 성금요일

예배를 위해 작곡된 음악극(수난극)으로, 총 68개의 성악곡이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으며, 연주 시간이 세 시간에 달합니다.

 

내용은 독일어 성경의 마태오 복음 26장과 27장을 전하는 가운데, 사이사이

새로운 대본의 아리아와 합창, 당시 전해 내려오는 코랄을 첨가해서 음악적

완성도와 극적 감동을 한층 높였습니다.

대본의 작가는 피칸더(Picander)라는 필명을 가진 시인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헨리치(Christian Friedrich Henrici, 1700-1764)이지만 바흐도 관여했을 것으로 봅니다.
 

첫 곡인 합창 ‘오라 딸들아, 내 애도를 도와다오’로 시작한 음악은 중반 즈음,

2부에서 복음사가(에반겔리스트)가 마태오 복음 26장 75절을 레치타티보로 읊는 부분에 이릅니다. 

‘그러자 곧 닭이 울었다.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 

이 성경 말씀에 이어 불리는 아리아가 바로 영화 <희생>에서 쓰인 곡,

 ‘불쌍히 여기소서(Erbarme dich)’입니다.

정황상 밖으로 나간 베드로가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내용이지요.

여성의 낮은 음역인 알토가 부르는 이 아리아는 노래가 나오기에 앞서 1분가량

바이올린이 지극히 아름답고 애절한 선율을 연주하는데, 이 바이올린 오블리가토는

노래 내내 독자적으로 연주되면서 곡에 매력을 더합니다.

아리아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나의 하느님, 제 눈물을 보아서라도 불쌍히 여기소서.

여기 보소서, 당신 앞에서 제 마음과 눈이 애통하게 우나이다.

나의 하느님, 제 눈물을 보아서라도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는 살면서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와 같은 순간을 얼마나 많이 겪을까요? 

복음적이지 못한 생각과 행동으로 자신이 부끄러워질 때마다 <마태수난곡>의

아리아 ‘불쌍히 여기소서’처럼 눈물로 주님의 자비를 구해봅니다. 

 

2022322333.jpg

 

20223223321.jpg

 

 

 

 

 

 

msn036.gif 교황님 말씀 - 하느님의 빛이 우리 마음을 다시 깨우도록 합시다

 

하느님의 빛은 우리를 끌어당기고, 우리를 깨웁니다.

또한 기도하고, 우리의 내면을 바라보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시간을 내려는

힘과 열망에 다시 불을 붙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영의 힘으로 육체의 피로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를 이겨 내지 못할 때, 성령께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합니다.

“오소서 성령님, 오시어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저는 주의 깊게 머물고, 깨어 있기를 원합니다.”

기도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이 잠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성령께 청하는 것입니다.

 

2022년 3월 13일

사순 제2주일 삼종기도 훈화 중

 

 

 

~~~~~~~~~~~~~~~~~~~~~~~~~~~~~~~~~~~~~~~~~~~~~~~~~~~~~~~~~~~~

                    공동체 소식        

* 본당 신부님 주중. 주일미사 강론은 홈페이지 '토막강론'에서 보실 수 있으십니다.

 

 사순 시기 

사순은 본래 ‘40일’이라는 뜻으로 성경에서 중대한 사건 을 앞두고 ‘준비하는 기간’을 상징합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전 40일간 재를 지켰고, 엘리야 예언자도 호렙산에 갈 때 40일을 걸었습니다. 

이 시기동안 신자들은 참회와 희생, 극기, 회개와 기도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합니다. 

또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을 기억하며 부활 대축일을 준비합니다.

▣ 3월은 성 요셉성월로 미사 시작전 기도로 성 요셉께 드리는 기도를 바치겠습니다.

▣ 부활 판공성사가 재의 수요일(3월2일) 이후 부터 있겠습니다.

수요일과 토요일은 미사 전, 주일은 미사 후에 있습니다.

▣ 3월27일(주일) 본당 레지오 아치에스 행사가 미사 후에 있겠습니다.

대상: 레지오 정단원, 예비단원, 협조단원 전체 

준비물: 묵주와 레지오 수첩

* 당일 아치에스 행사 참가자는 주일미사 의무 참여 바랍니다.

▣ 4월3일(주일) 미사에 훼잇빌 최학성 세례자 요한신부님께서 방문하셔서

미사와 판공성사를 집전 해 주시겠습니다.

판공성사는 십자가의 길 예식 중과 미사 후에도 있겠습니다.

▣ '십자가의 길'이 사순 첫주 3월6일(주일)부터 시작됩니다. 

올해는 신자분들의 많은 참여하기를 바라며 '십자가의 길'을 주일미사 전에 진행합니다.

각 구역 '십자가의 길' 스케줄 - 매 주일미사 시작 전 오전 9시45분

  • 3월 27일 - 야고보 ,필립보 구역
  • 4월3일 - 시몬구역
  • 4월 10일 - 타데오 구역
  • 성 금요일 미사 시작 전 오후 7시15분 -  전신자

▣ 교구청에서 2차헌금 요청이 아래와 같이 있습니다. 

  • 3월 26일, 27일 (사순 넷째 주) - 가톨릭 구호단체를 위하여
  • 4월15일 (성 금요일) - 성지(Holyland)를 위하여
  • 4월24일 (하느님의 자비주일) - 가톨릭 가정선교 관심을 위해

▣  2022년  4월 매일미사책이 도착했습니다.

정기구독 하시는 분들은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매월 각권은 $7 이며, 각 권 구입시 4월미사책은 $10 입니다.

정기 구독료는  신청 개웙 x $7 하시면 됩니다.

신청하시는 방법은 아래 봉헌금내시듯 여러방법으로 신청하시면 되겠습니다.    

▣ 2022년도 BAA(Bishop's Annual Appeal)   

1. 교구청에서 우편으로 BAA를 받으신 분은 용지에 기재하셔서 직접 우편발송 하셔고 되고

2. 성당에 나오시는 분은 BAA 봉투를 봉헌함에 봉헌 (빈 봉투 성당에 비치)

3. 체크로 보내시고자 하시는 분은 편영준 미카엘형제님께 우편발송

4. 또는 온라인으로 직접봉헌 - GivetoBAA.org (저희 본당 고유번호는 614 입니다)

 * BAA Tax 공제는 저희 본당과는 무관하고 교구청에서 직접 발송됩니다.

▣  Zarama 주교님께서 권한으로 COVID-19 동안 신자들은 주일 미사 참여 

의무를 면제 해주시고, 노인이나 기저질환 환자등 케어를 필요로 하는 분들은 

가급적 마스크 착용을 권장 하십니다.

▣  코로나19의 빠른 극복을 위해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기를 

바라며, 성당내의 부엌사용과 모임을 자제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  성전안에서 미사 전, 미사 후 잡담을 삼가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시는분들을 위하여 성전밖으로 나가셔서 대화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  알림: 본 성당주보에 교우들과 함께 나누고싶으신 글이나 알리고싶으신 글 있으시면 언제나 보내주십시요. 

보내실곳은 성당 총무부 방정모 요한형제님( johnbang74@gmail.com)께 접수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단, 특정 이슈가 되는 글은 편집 삼가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교무금, 건축헌금, 주일헌금 등 봉헌금은 미리 준비하셔서 성당 입구에서만 수합 합니다.  

단, 미사예물은 미사 전에 직접 제대에 올려 주십시요.

▣ COVID19으로 본당 미사에 직접 참여를 못 하시는 분들께서는 교무금, 건축헌금, 주일헌금 등     

앞으로는 세가지중에 편하신 방법으로 알아서 결정 하시면 되겠습니다.

    1. 미사 참여시 직접 전달

    2. 우편이용 봉헌 -  체크를 본당 재무분과장 편영준 미카엘형제님께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Pay to the order of : SPJCC (주소는 각구역장님께 문의)

    3. 인터넷이용 봉헌 - https://spjcc.weshareonline.org  

현재 교무금, 건축헌금, 감사헌금 및 주일헌금을 봉헌하실 수 있으며 매달 원하시는 

주기로 자동결제되도록 예약하실 수도 있습니다

처음 봉헌하실 때 계좌를 만드시면 그 후로는 간단하게 사용하실 수 있으며 봉헌 내역도 

확인 가능합니다. 사용 문의사항은 재무분과로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봉헌하시는 교무금안에는 저희 성당건물 모기지는 포함 하지 않고 있습니다. 

세금혜택은 총 봉헌금으로 받으시기 때문에 건축헌금에 비중을 두시는것도 저희 건물 빚을 갚는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어렵고 불편한 환경에서도 봉헌금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  코로나19 이후로 봉헌하시는 체크는 경우에 따라 디파짓이 조금 늦어질 수 있음을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 {교황님의 3월 기도 지향}  

일반: 생명 윤리의 도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응답

생명 윤리의 새로운 도전에 맞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와 실천으로 언제나 

모든 인간 생명의 존엄을 수호하도록 기도합시다.

⛪ {교황님의 4월 기도 지향}  

일반: 보건 의료 종사자들

특히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아픈 이들과 노인들에게 봉사하는 보건 의료

종사자들이 정부와 지역 공동체의 적절한 지원을 받도록 기도합시다.

 

  * 미사 방송 보기    

 

1.가톨릭평화방송 매일 미사 시청   

    http://www.cpbc.co.kr/TV/178/  

    굿뉴스 가톨릭미디어 매일미사

    https://youtu.be/RN2kMdXPtNg - 3.27. 2022

     

 

2. 미국 가톨릭 방송(EWTN)에서 매일 미사 시청   

     https://www.youtube.com/channel/UCijDos-LUTh9RQvSCMQqN6Q

     https://youtu.be/4VbqqQyzu0g - 3.27. 2022

 

 

3. 랄리 주교좌성당 미사    

     Holy Name of Jesus You Tube Channel

     https://youtu.be/dPlrQUQ8Sz0 - 3.27. 2022

        

 

4. VATICAN MEDIA LIVE 

     https://youtu.be/JuRrQgW5J4Y​​​ - Live

     https://youtu.be/FcCKiP_U8LQ - 2022년3월23일 프란치스코 교황님 수요 가르침 말씀 "유산과 작별 ㅡ 기억과 증언"​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니,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희망을 투구로 씁시다. 1테살(5장 8절)

번호 제목 이름 세례명 날짜 조회 수
410 (자) 사순 제5주일 2022년 4월 3일 AdelaKim Adela 2022.03.30 192
» (자) 사순 제4주일 2022년 3월 27일 AdelaKim Adela 2022.03.23 126
408 (자) 사순 제3주일 2022년 3월 20일 AdelaKim Adela 2022.03.15 145
407 (자) 사순 제2주일 2022년 3월 13일 AdelaKim Adela 2022.03.09 147
406 (자) 사순 제1주일 2022년 3월 6일 AdelaKim Adela 2022.03.01 135
405 (녹) 연중 제8주일 2022년 2월 27일 AdelaKim Adela 2022.02.22 129
404 (녹) 연중 제7주일 2022년 2월 20일 AdelaKim Adela 2022.02.16 124
403 (녹) 연중 제6주일 2022년 2월 13일 AdelaKim Adela 2022.02.09 118
402 (녹) 연중 제5주일 2022년 2월 6일 AdelaKim Adela 2022.02.02 144
401 (녹)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 2022년 1월 30일 AdelaKim Adela 2022.01.25 136
400 (녹) 연중 제3주일(하느님의 말씀 주일) 2022년 1월 23일 file AdelaKim Adela 2022.01.19 143
399 (녹) 연중 제2주일 2022년 1월 16일 AdelaKim Adela 2022.01.12 234
398 (백) 주님 세례 축일 2022년 1월 9일 AdelaKim Adela 2022.01.05 115
397 (백) 주님 공현 대축일 2022년 1월 2일 file AdelaKim Adela 2021.12.29 249
396 (백)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2021년 12월 26일 AdelaKim Adela 2021.12.23 159
395 (백) 주님 성탄 대축일 - 밤 미사 2021년 12월 24일 / 낮 미사 12월 25일 AdelaKim Adela 2021.12.23 158
394 (자) 대림 제4주일 2021년 12월 19일 AdelaKim Adela 2021.12.14 146
393 (자)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2021년 12월 12일 AdelaKim Adela 2021.12.09 126
392 (자)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2021년 12월 5일 AdelaKim Adela 2021.11.30 152
391 (자) 대림 제1주일 2021년 11월 28일 AdelaKim Adela 2021.11.24 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