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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당주보입니다.

랄리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 

ST. HA-SANG PAUL JUNG CATHOLIC CHURCH 

주임신부: 이동욱 (도마)  

3031 Holland Rd Apex, NC 27502      Tel: (919) 363-0408      Fax: (919) 363-0409

입당송

주님은 내 버팀목 되어 주셨네. 내가 그분 마음에 들었기에, 넓은 들로 이끄시어 나를 구하셨네.   <대영광송>

제1독서  집회 27,4-7

화답송

◎ 주님, 당신을 찬미하오니 좋기도 하옵니다.
○ 주님을 찬미하오니 좋기도 하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여, 당신 이름 찬송하나이다. 아침에는 당신 자애를, 밤에는 당신 진실을 알리나이다. ◎
○ 의인은 야자나무처럼 우거지고, 레바논의 향백나무처럼 자라나리라. 주님의 집에 심겨, 우리 하느님의 앞뜰에서 우거지리라. ◎
○ 의인은 늙어서도 열매 맺고, 물이 올라 싱싱하리라. 불의가 없는 나의 반석, 주님이 올곧으심을 널리 알리리라. ◎

제2독서  1코린  15,54-58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나도록 너희는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녀라. 

복음  루카  6,39-45

영성체송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이다. 지극히 높으신 주님 이름 찬양하리이다.

 


 생명의 말씀  

     내 눈의 들보                                   

         정수용 이냐시오 신부 | 가톨릭평화방송 · 평화신문 보도주간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오늘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가르침에 이어 나오는 구절입니다.

살면서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을 심판합니다.

상대의 작은 허물과 미성숙함을 들추어내며 그의 단점을 짚어냅니다.

그러면서 상대방보다 내가 더 잘났다는 우월감에 우쭐함을 느끼며 만족합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객관화해서 스스로를 판단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런 상황을 남의 눈에서 티끌을 빼 주겠다고 하지만 정작

자신의 눈에 들보가 들어 있음을 깨닫지 못한 어떤 사람에 대한 비유로 표현하십니다.

 

사실 눈은 우리 신체 기관에서 매우 예민한 곳 중 하나입니다.

미세한 혈관과 신경이 모여 이루어져 있고, 작은 티끌 하나만 들어가도

금방 불편함을 느낍니다.

그에 비해 들보는 티끌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큰 부피를 가지고 있습니다.

들보는 보통 집을 지을 때,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며 하중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하기에 들보가 작은 눈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그만큼 자신의 눈 속에 거대한 들보가 들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성찰하는 일이 쉽지

않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눈에 작은 티끌만 들어 있어도 우리는 불편함을 느끼는데, 하물며 들보가

들어 있다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불편을 느끼지 못할 정도의 상황이라면 내 생각과 주장이 얼마나

완고해진 상황이라는 말일런지요. 그래서 우리가 완고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내 눈의 들보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런 들보를 가지고 살면서도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았던 스스로를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들보를 빼내야 앞이 밝아져 다른 형제의 티도 빼 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상황을 경제적 가치로만 판단합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지, 아니면 손해나는 일인지에 따라 분간하지요.

다른 어떤 사람은 내가 사람들 앞에 멋있게 드러나는지 그렇지 않은 지만 바라보기도 합니다.

앞의 상황은 돈의 들보, 뒤의 상황은 자아라는 들보가 들어 있기에 그러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눈에 들어 있는 들보를 바라보게 해 줍니다.

미처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완고해진 내 눈의 들보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들보를 들어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바로 ‘말씀’이 우리 스스로를 깨닫게 해 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거울이 되어 우리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비춰주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 주도 말씀을 자주 읽고 접하는 것을 통해 우리가 우리 눈의 들보를 인식하고

용감하게 빼내어, 새로운 시선을 간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msn035.gif  [시노드 특집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한 가장 중요한 일

                       - 기억하기              

                양주열 베드로 신부 | 통합사목연구소 소장, 시노드 교구 실무자

 

각 본당과 공동체 차원에서 제16차 세계주교시노드 교구 단계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오미크론 대유행 중에도 시노드 소그룹 모임을 준비해 주시고 참가해

주시는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이번 시노드를 통해 하느님 백성 모두가 교회의 사명에 함께 참여하여 친교를

이루어 더욱더 시노드적인 교회가 되도록 마음을 모아 ‘함께’ 기도해 주시는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번 시노드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함께하는’ 시노드 방식을 익히는 데 있습니다.

이제까지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해왔던 모든 교회 생활과

직무수행을 ‘함께하는’ 시노드 방식으로 새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노드에서 다룰 의안을 하느님 백성 모두가 ‘함께’ 논의하여 모으는 방식이 도입되었습니다.

 

하느님 백성 모두에게서 교회의 현안을 듣고자 교구 차원, 대륙 교회 차원, 세계 교회

차원에 따라 점진적으로 시노드를 진행하는 것입니다.

시노드 방식으로 진행되는 교구 단계의 소그룹 모임에 참여함으로써 시노드 방식을

배우고 익히며 시노드 교회를 이루게 되고,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해

제안함으로써 또다시 시노드 교회를 이루어 시노달리타스를 통해 시노드 교회로 성장합니다.
 

교회가 새로운 시노드 방식으로 진행하는 이 ‘함께’하는 여정이 성공하기를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시노드를 바라보거나 알아보는 것으로 그치는 대신 반드시 지금보다 더 나은

시노드 교회를 만들겠다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잠시 깊은 호흡과 함께 하느님을 향해 마음으로 머물러 주십시오. 

“주님, 저희가 당신 앞에 있나이다.”
시노드 과정에서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기억하기’입니다.

우리 자신의 삶에서, 신앙생활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 삶 안에 함께하기를 바랐던 우리 자신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안에서 ‘기억’은 ‘바로 지금 그리고 이곳’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들어 올리는

신비로운 방식입니다.

미사 때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하면서 기억하는 순간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과 새로운 계약을 맺게 되는 것도 같은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함께’하는 시노드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체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는 언제였습니까?

누구와 함께하였습니까?

언제, 어디서 그리고 어떤 일이었습니까?

그 안에서 깨달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것이 ‘함께 걷는’ 시노드 여정을 위해 우리 각자가 해야 하는 ‘개인 성찰’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시노드 여정은 우리 각자가 참여하는 여정(개인 성찰)이며,

모두가 함께 참여하는 여정(소그룹 모임)을 이룹니다.

 

​교황님의 "여행 떠날 준비 됐습니까?"·시노드 3년 여정 막 올려

https://youtu.be/klXXwSdI7Q8

 

msn036.gif [말씀묵상]  

    이기심 버리고… 나를 반성하고 남을 사랑하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살레시오회)

 

회개와 성찰은 나 자신부터 먼저 시작돼야


형제들과 함께 이웃 본당 판공성사를 도와주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출발하기 전에 제가 형제들에게 그랬습니다.

“오늘만큼은 날이 날인만큼 사제로서 패션에 신경들 좀 써주세요!” 그랬더니

형제들이 즉시 이구동성으로 반격을 하시더군요.

“아니, 그런 말씀 하실만한 분이 그런 말씀하셔야지요. 신부님, 구두 좀 보세요!

하얗게 소금끼가 남아있는데, 또 구두 신고 바다 다녀오셨군요.

그리고 바지 뒤쪽에도 흙이 잔뜩 묻어있는데요.”

저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차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일을 생각하니 오늘 복음 말씀이 어찌 그리 뼈저리게 다가오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루카 복음 6장 41~42절)

참 인간이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지속적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며, 반성하고 진단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과오와 부족함에 대해 스스로 질책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도 권리도 없습니다.

이웃을 저울질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면밀히 살펴보아야 마땅합니다.

회개와 성찰은 나 자신부터 먼저 시작돼야 합니다.

날카로운 비판 전문가들은 이웃을 비판하기에 앞서 비판의 잣대를 자신에게 먼저 적용해봐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웃의 결핍을 바라보고 필요한 조언을 건넬 때는 다른 무엇에 앞서

사랑의 마음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웃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는 사람은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도 동일한 것을 요구해야 마땅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합니다.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도 않고 파악하려고도 애쓰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려고 기를 씁니다.

이런 사람을 두고 우리는 위선자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달라도 너무 다른 위선자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도 치명적인 병을 지니고 있기에 자기 한 목숨 살리기도 힘든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진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진리에 대해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참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하는 것입니다.

자질이 없는 지도자, 능력이 없는 지도자, 무엇보다도 교만한 지도자,

이기적인 지도자가 남을 가르치려 든다면, 그것처럼 위험한 일이 다시 또 없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이나, 가르침 받는 사람이나 둘 다 망하는 길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누구나 세상 앞에서 지도자입니다.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쇄신, 쉼 없는 자기 계발과 자기 연마는 지도자인 우리에게 필수적인 노력입니다.
 

제임스 티소 ‘장님을 이끄는 장님’.

 

첫째가는 인생 과제, 나 자신의 실체를 파악하는 일

유다 문법에도 우리나라 못지않게 과장법이 자주 사용되곤 했습니다.

우리도 얼마나 과장법을 많이 사용합니까?

좀 더운 걸 가지고 ‘불볕더위’니, ‘용광로 속’이니, 하며 과장합니다.

묵직한 우럭 한 마리 잡으면 ‘팔뚝만하다’고 과장합니다.

키가 좀 크면 ‘전봇대 같다’고 과장합니다.

좀 보고 싶은 걸 가지고 ‘보고 싶어 죽겠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꽤 센 과장법을 사용해서 남의 결점에 목숨을

걸기보다 우리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자숙하고 반성할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들보란 건물의 칸과 칸 사이의 두 기둥 위를 건너지르는 나무(crossbeam)를 의미합니다.

혼자 들기 버거운 무겁고 큰 나무토막입니다.

아무리 우리 눈이 왕방울만큼 크다 하여도 길이가 몇 미터나 되는 들보가

우리 눈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 몸길이보다 더 긴 들보가 어떻게 우리 눈 속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신 것은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는 들보입니다.

몇 미터뿐만 아니라 수십 미터나 되는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는 허물들, 결점들,

잘못들, 죄악들, 오류들, 언행의 불일치, 그릇된 지향, 하늘을 찌르는 위선, 극도의 이기심을 본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눈을 가지고 있고, 대단한 안목을 지니고 있고, 상대방의 내면을

꿰뚫을 수 있는 지혜를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정작 가장 중요한 자기 자신을

못 볼 때가 많습니다.

내가 나를 잘 안다고 하지만, 사실 나는 나를 조금 밖에 모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나만 아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남들은 다 아는데 나만 모르고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고 오직 주님만이 아시는 부분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 같은 경우 예수님을 박해하기 이전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대단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올곧다고 생각했습니다. 티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부심도 대단했습니다.

행동 하나하나가 거침없고 당당했습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뒤로 크게 변화됩니다.

자신 안에 어두운 부분이 그토록 많았다는 것을 알게 돼 깜짝 놀랍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들이 다 하느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

했는데, 사실은 하느님을 박해하는 일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결국 바오로 사도는 스스로를 파악하는데 100% 실패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게 됩니다.

부끄럽고 참담한 심정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돌아보니 모든 것이 다 틀린 것이었습니다.”

 

 

msn008.gif [호기심으로 읽는 성미술] 

              십자고상 (하) 11세기 이후

      떨군 머리 피투성이 예수님에게서 희생과 사랑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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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가톨릭 교회와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난의 그리스도 십자고상’ 그림은 언제부터 그려지기 시작했을까요?

 

미술사학자들은 수도원을 중심으로 서방 교회 특히 프랑스 남부 일대에서

로마네스크 미술을 꽃피우던 11세기 때부터 이러한 도상(圖像)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교인들에게 선포하기 위해 죽음을 이기신 승리자

그리스도를 그리지 않고 수도원에서 개인 묵상과 신비 체험을 통해 얻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 그분 외아드님의 순종과 희생을

드러내기 위해 수난의 십자고상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11세기 때부터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눈을 감은 채 머리를 떨구고,

온몸은 피투성이며, 양팔은 힘없이 축 늘어져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채 있는

모습의 도상이 유행처럼 퍼졌습니다. 그 이전 시대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한

도상이 유행했다면 이 시기부터 그리스도의 인성을 드러내는 성미술이 확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13세기에 들어서면 수난의 그리스도 십자고상 도상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납니다.

이전까지는 동방 교회의 영향으로 십자가상에 주님께서 양손과 양발에 각

하나씩 모두 4개의 못에 박힌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하지만 이때부터는 두 발이 하나로 겹쳐진 상태로 3개의 못에 박힌 주님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이 드러나는 이러한 십자고상의 뿌리는 동방 교회 성미술에 있습니다.

 이 프레스코화는 11세기 터키 카파도키아 지방 괴레메 동굴 성당에 그려진

그리스도의 인성을 드러낸 십자고상 작품입니다.

오늘날 이 지역 사람들은 이 동굴 성당을 ‘어두운 성당’(Karanlik Kikise)이라 부릅니다.

깊고 어두운 성당에 그려진 프레스코화여서 긴 세월 동안 무슬림의 훼손을

피해 그나마 지금의 모습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이 프레스코화는 십자가상의 주님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의 구도를 이룹니다.

먼저, 십자가상의 주님 모습을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긴 고수머리에 수염을 길렀습니다.

풍성한 머리카락과 수염은 인성의 충만함을 드러냅니다.

후광은 주님 신성과 영광을 상징하고 후광 안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에게만 그린다고 여러 차례 설명한 바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눈을 감으신 채 오른쪽으로 머리를 떨구고 계십니다.

주님의 죽음과 ‘자기 비움’(필리 2,7) 즉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신 겸손을 보여줍니다.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필리 2,8)하지 않으셨더라면, 죄의 용서, 곧 우리의 정화를 위해 그분께서

피를 쏟으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아우구스티누스, 「요한복음 강해」 중에서)

 

십자가상의 주님은 허리에 얇은 흰 천만 두른 채 벌거벗은 모습을 하고 계십니다.

십자가의 길 수난을 겪었지만, 주님의 몸은 정결하리만큼 깨끗합니다.

또 인간의 시신과 달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의 육신은 근육이 선명합니다.

이는 ‘하느님이시며 인간’(Θεανθρωποs, 테안트로포스)이신 주님의 신성과 인성이

단 한 순간도 나뉨이 없으며 그분의 거룩한 몸(성육신)은 결코 부패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죽은 이들이 부활하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해 줄 것입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1코린 15,42-43)

 

주님의 다섯 상처에는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특히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는 피와 물이 솟구치고 있습니다.

죽은 인간의 육신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입니다.

주님의 피는 ‘승리’를, 물은 ‘세례’를 상징합니다.

결국, 이 상처는 주님의 피와 물로 세우신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새로운 하와’(교회)는 최초의 하와가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아담’(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세례(물)와 성찬(피)이라는 교회의 기본적인 두 성사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것입니다.”(「비잔틴 성화 영성 예술」 중에서)

 

십자가상의 주님 오른편에는 성모 마리아와 두 여인이 비통해 하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비통함을 애써 참듯 얼굴에 왼손을 대고 있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 오른손을 뻗고 계십니다.

주님의 죽음에 땅이 흔들리고 한낮이 어둠에 묻힐 만큼 창조계가 슬퍼했는데

성모님의 애통함을 이보다 몇 배 더했을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 아들을 십자가에서 내리려고 오른손을 뻗으시지만, 왼손으로

겨우 얼굴을 지탱한 채 신앙의 눈으로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줄 주님의 상처를 바라봅니다.

아들의 십자가상의 속량을 지켜본 성모님은 성령을 입어 이제 교회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십자가상의 주님 왼편에는 사랑하는 제자 요한 사도가 서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짧은 머리에 수염이 없는 앳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 역시 비탄에 빠진 듯 얼굴을 오른손에 묻고 왼손을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요한 뒤에 갑옷을 입고 창으로 무장한 군인은 주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백인대장 론지누스입니다.

론지누스는 일반적으로 왼손에 창을 들고 오른손은 웅변하듯 십자가상의 예수님께

향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주님의 죽음을 보고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루카 23,47)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괴레메 ‘어두운 성당’의 수난의 그리스도 십자고상 프레스코화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드러내는 십자고상의 가장 정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 가톨릭평화신문 -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msn036.gif 교황님 말씀 - 자기중심주의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기쁨

참행복은 예수님의 제자와 동의어입니다.

주님께서는 자기중심주의의 노예살이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심으로써

우리의 닫힌 마음을 여시고, 우리의 완고한 마음을 녹여주시며, 종종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발견하는 참된 행복을 밝히 드러내십니다.

 

우리의 삶을 이끄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의 편견이나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그분이십니다.

제자란 결국 예수님의 이끄심에 자기 자신을 내어 맡기는 사람, 예수님께

마음을 열고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그분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출처 : 바티칸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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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체 소식        

* 본당 신부님 주중. 주일미사 강론은 홈페이지 '토막강론'에서 보실 수 있으십니다.

 

▣ 3월 2일(수)은 사순 시기가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 로 금식재와 금육재를 지켜야 합니다

‘사순 시기’는 재의 수요일(3월 2일)부터 성목요일(4월 14일) 의 주님 만찬 미사 전

까지이며, 주님 부활 대축일을 준비하는 회개와 기도의 시기입니다.

사순 시기가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과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는

금식재와 금육재를 함께 지켜야 합니다.

▣ 본당 신부님의 일정관계로 3월 9일(수)과 23일(수)에 10시 미사가 없습니다.

착오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 3월은 성 요셉성월로 미사 시작전 기도로 성 요셉께 드리는 기도를 바치겠습니다.

▣ 3월 2일(수) ‘재의 수요일’ 예식을 3월5일(토) 저녁미사와 3월6일(주일) 미사에도

재의 예식을 거행합니다. 

▣ 부활 판공성사가 재의 수요일(3월2일) 이후 부터 있겠습니다.

▣ '십자가의 길'이 사순 첫주 3월6일(주일)부터 시작됩니다.

올해는 신자분들의 많은 참여하기를 바라며 '십자가의 길'을 주일미사 전에 진행합니다.

각 구역 '십자가의 길' 스케줄 - 매 주일미사 시작 전 오전 9시45분

  • 3월6일 - 요한 구역
  • 3월13일 - 베드로 구역 (참고: 썸머타임 시작)
  • 3월 20일 - 안드레아,토마 구역
  • 3월 27일 - 야고보 ,필립보 구역
  • 4월3일 - 시몬구역
  • 4월 10일 - 타데오 구역
  • 그리고 성 금요일 오후 세시

▣ 2022년도 BAA(Bishop's Annual Appeal)   

1. 교구청에서 우편으로 BAA를 받으신 분은 용지에 기재하셔서 직접 우편발송 하셔고 되고

2. 성당에 나오시는 분은 BAA 봉투를 봉헌함에 봉헌 (빈 봉투 성당에 비치)

3. 체크로 보내시고자 하시는 분은 편영준 미카엘형제님께 우편발송

4. 또는 온라인으로 직접봉헌 - GivetoBAA.org (저희 본당 고유번호는 614 입니다)

 * BAA Tax 공제는 저희 본당과는 무관하고 교구청에서 직접 발송됩니다.

▣ 2021년 텍스보고 안내

2021년 Tax Form은 예년처럼 e-mail로 (전자우편) 보내드릴 예정이오니

필요하신분들께서는재무분과장 편영준 미카엘형제님이나 각 구역장님께 

세대주 이름과 영문이름을 함께 신청 해 주시기 바라며, 신청하시는분들께만 발송 할 예정입니다.

이메일 신청은giving.spjcc@gmail.com  

▣  "공현스티커" 배포

성당 입구에 "공현스티커" 를 배치 해 두었으니 미사 때 오셔서 필요하신 만큼 

가져가십시요. 

※ 사용법: 주로 드나드는 현관 위 문틀이나 문 자체에 스티커를 붙입니다.

(손가락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려 붙이기, 나중에 페인트 벗겨짐에 주의)

▣  전세계적으로 오미크론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CDC에서는 오미크론에 천 마스크나 덴탈용 마스크는 면역력이 떨어지므로, KF 94

등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성체를 영하실때에도 차례로 격리거리 유지하여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사 참례 하고자 하시는 교우 여러분들은 안전한 환경 안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협조 부탁 드립니다. 

▣  점차 심해지는 변형 코로나19의 빠른 극복을 위해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기를 바라며, 성당내의 부엌사용과 모임을 자제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  성전안에서 미사 전, 미사 후 잡담을 삼가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시는분들을 위하여 성전밖으로 나가셔서 대화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  2022년 3월 매일미사책이 도착했습니다. 

정기구독 하시는 분들은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매월 각권은 $7 이며, 각 권 구입시 4월미사책은 $10 입니다.

정기 구독료는  신청 개웙 x $7 하시면 됩니다.

신청하시는 방법은 아래 봉헌금내시듯 여러방법으로 신청하시면 되겠습니다.    

▣  알림: 본 성당주보에 교우들과 함께 나누고싶으신 글이나 알리고싶으신 글 있으시면 언제나 보내주십시요. 

보내실곳은 성당 총무부 방정모 요한형제님( johnbang74@gmail.com)께 접수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단, 특정 이슈가 되는 글은 편집 삼가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  Zarama 주교님 권한으로 COVID-19 동안 신자들은 주일 미사 참여 의무를 면제 받았습니다.  

 교무금, 건축헌금, 주일헌금 등 봉헌금은 미리 준비하셔서 성당 입구에서만 수합 합니다.  

단, 미사예물은 미사 전에 직접 제대에 올려 주십시요.

▣ COVID19으로 본당 미사에 직접 참여를 못 하시는 분들께서는 교무금, 건축헌금, 주일헌금 등     

앞으로는 세가지중에 편하신 방법으로 알아서 결정 하시면 되겠습니다.

    1. 미사 참여시 직접 전달

    2. 우편이용 봉헌 -  체크를 본당 재무분과장 편영준 미카엘형제님께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Pay to the order of : SPJCC (주소는 각구역장님께 문의)

    3. 인터넷이용 봉헌 - https://spjcc.weshareonline.org  

현재 교무금, 건축헌금, 감사헌금 및 주일헌금을 봉헌하실 수 있으며 매달 원하시는 

주기로 자동결제되도록 예약하실 수도 있습니다

처음 봉헌하실 때 계좌를 만드시면 그 후로는 간단하게 사용하실 수 있으며 봉헌 내역도 

확인 가능합니다. 사용 문의사항은 재무분과로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봉헌하시는 교무금안에는 저희 성당건물 모기지는 포함 하지 않고 있습니다. 

세금혜택은 총 봉헌금으로 받으시기 때문에 건축헌금에 비중을 두시는것도 저희 건물 빚을 갚는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어렵고 불편한 환경에서도 봉헌금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  코로나19 이후로 봉헌하시는 체크는 경우에 따라 디파짓이 조금 늦어질 수 있음을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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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님의 2월 기도 지향}  

일반: 여자 수도자들과 축성 생활자들

여자 수도자들과 축성 생활자들의 사명과 용기에 감사하며, 우리 시대의 도전들에

대한 새로운 응답들을 끊임없이 찾도록 그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 {교황님의 3월 기도 지향}  

일반: 생명 윤리의 도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응답

생명 윤리의 새로운 도전에 맞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와 실천으로 언제나

모든 인간 생명의 존엄을 수호하도록 기도합시다.

 

  * 미사 방송 보기    

 

1.가톨릭평화방송 매일 미사 시청   

    http://www.cpbc.co.kr/TV/178/  

    굿뉴스 가톨릭미디어 매일미사

    https://youtu.be/PkAxqS_MKxk - 2.27. 2022

    

 

2. 미국 가톨릭 방송(EWTN)에서 매일 미사 시청   

     https://www.youtube.com/channel/UCijDos-LUTh9RQvSCMQqN6Q

     https://youtu.be/7nrBabSIVPM​ - 2.27. 2022

 

 

3. 랄리 주교좌성당 미사    

     Holy Name of Jesus You Tube Channel 

     https://youtu.be/xAZyg150rxY - 2.27.  2022

     

 

4. VATICAN MEDIA LIVE 

     https://youtu.be/JuRrQgW5J4Y​​​ - Live

     https://youtu.be/Bo6ZNzV6HWU - 2022년 2월23일 프란치스코 교황님 수요 가르침 말씀 "성경을 통한 노년의 가치와 의미​"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16장 16절)

번호 제목 이름 세례명 날짜 조회 수
410 (자) 사순 제5주일 2022년 4월 3일 AdelaKim Adela 2022.03.30 192
409 (자) 사순 제4주일 2022년 3월 27일 AdelaKim Adela 2022.03.23 126
408 (자) 사순 제3주일 2022년 3월 20일 AdelaKim Adela 2022.03.15 145
407 (자) 사순 제2주일 2022년 3월 13일 AdelaKim Adela 2022.03.09 147
406 (자) 사순 제1주일 2022년 3월 6일 AdelaKim Adela 2022.03.01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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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3 (녹) 연중 제6주일 2022년 2월 13일 AdelaKim Adela 2022.02.09 118
402 (녹) 연중 제5주일 2022년 2월 6일 AdelaKim Adela 2022.02.02 144
401 (녹)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 2022년 1월 30일 AdelaKim Adela 2022.01.25 136
400 (녹) 연중 제3주일(하느님의 말씀 주일) 2022년 1월 23일 file AdelaKim Adela 2022.01.19 143
399 (녹) 연중 제2주일 2022년 1월 16일 AdelaKim Adela 2022.01.12 234
398 (백) 주님 세례 축일 2022년 1월 9일 AdelaKim Adela 2022.01.05 115
397 (백) 주님 공현 대축일 2022년 1월 2일 file AdelaKim Adela 2021.12.29 249
396 (백)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2021년 12월 26일 AdelaKim Adela 2021.12.23 159
395 (백) 주님 성탄 대축일 - 밤 미사 2021년 12월 24일 / 낮 미사 12월 25일 AdelaKim Adela 2021.12.23 158
394 (자) 대림 제4주일 2021년 12월 19일 AdelaKim Adela 2021.12.14 146
393 (자)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2021년 12월 12일 AdelaKim Adela 2021.12.09 126
392 (자)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2021년 12월 5일 AdelaKim Adela 2021.11.30 152
391 (자) 대림 제1주일 2021년 11월 28일 AdelaKim Adela 2021.11.24 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