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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리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 

ST. HA-SANG PAUL JUNG CATHOLIC CHURCH 

주임신부: 이동욱 (도마)  

3031 Holland Rd Apex, NC 27502      Tel: (919) 363-0408      Fax: (919) 363-0409

입당송

하느님,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원할 성채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위하여 저를 이끌어 주소서.

제1독서  예레 17,5-8

화답송

◎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
○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

제2독서  1코린  15,12.16-20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복음  루카  6,17.20-26

영성체송    

그들은 실컷 먹고 배불렀네. 주님이 그들의 바람을 채워 주셨네. 그들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으셨네.

 


 생명의 말씀  

     상대적 박탈감과 참 행복                                     

                  김상우 바오로 신부 |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운전 중 이쪽 차선의 차들은 꿈쩍도 안 하지만 반대 차선은 텅 비어 있을 때 ‘상대적

박탈감’을 느낍니다.

반대로 이쪽은 정체가 없지만, 맞은편 차들이 서 있을 때 묘한 ‘만족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감정들은 ‘상대적’이며 참 행복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서 참 행복을 찾아야 할까요? 이번 주 성경 말씀에서 실마리를 찾아봅니다.
 

제1독서(예레 17,5-8)는 저주와 행복에 관한 상반된 예언을 들려줍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예레 17,5) “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예레 17,7-8) 

 

사람에게 의지하는 이는 주님에게서 떠나 있기에 교만해지기 쉽지만,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이는 겸손 안에 머물기에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제2독서(1코린 15,12.16-20)는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믿음·희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1코린 15,17)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희망의 근거이기에, 이 믿음과 희망은

현세적 행복만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이처럼 우리 신앙인에게 믿음과 희망과 행복은 현세가 아니라 영원을 지향합니다.
 

복음(루카 6,17.20-26)은 참 행복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지금 굶주린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 예수님 때문에

미움을 받고 모욕을 당하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리스도인의 참 행복은 다른 이들과 나 자신을

비교하며 느끼는 상대적 만족감과는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의 참 행복은 사람에게 의지하여 주어지는 일시적 보상과 위로와도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의 참 행복은 하느님을 신뢰하기에 고통의 현실까지 감내할 수 있는 

‘십자가의 길’에서 찾아야 합니다.
물론 신앙인이라고 해서 ‘하늘’만 바라보며 현실에 무관심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땅’ 위에 발을 딛고 살아가되 사람에게서 오는 위로나 만족만을

지향하거나,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믿음과 희망으로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도록 초대받은 행복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msn035.gif  [생활속의 복음]         

              가난한 사람이 행복한 이유                  

                               함승수 신부(서울대교구 수색본당 부주임)

 

음식을 먹을 때 맛있는 것을 먼저 먹는 사람이 있고 나중에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삶을 대하는 태도와도 연결됩니다.

맛있는 것을 먼저 먹는 사람은 지금 당장의 즐거움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보통 심리적 정신적으로 약한 모습을 보입니다.

인내와 기다림 속에서 욕망을 조절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반면 맛있는 것을 나중에 먹는 사람은 고통과 시련을 견뎌내는 힘이 상대적으로 강합니다.

더 좋은 가치에 대한 희망이 현재의 어려움을 견뎌낼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맛있는 것만 골라 먹는 이기적인 식사가 아닙니다.

나의 건강을 위해, 함께 살아가는 형제 자매를 위해 상대적으로 맛없는 것들까지 다

먹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진짜 맛있는 것을 먹으리라는 희망을 급하게 소모하기보다, 희망을 마음에

품고 삶을 살아갈 원동력으로 삼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참된 행복은 바로 이런 희망을 바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그 희망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구분하시는 기준은 단순히 재물을 많이 가졌는가

적게 가졌는가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부유한 사람’은 자기 삶의 기반을 자신이 소유한 재물에서

찾으려 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하느님이,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안일한 마음으로 현재의 상태에 안주한 ‘고인 물’이 되어 욕심으로 썩어가기에 불행한 겁니다.

반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가난한 사람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얻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전능하고 무한하신 하느님을 믿고 바라고 사랑하기에 그들은 늘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으로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갑니다.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구원을 향해 흐르기에 늘 생명과 활력이 넘치는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런 ‘진리’를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당장의 이익과 세속의 가치들을 좇는 이들이 잘사는 모습을 보면 억울하고 속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이미 위로를 받았다’고 하십니다.

이는 세속적인 이익과 즐거움이 주는 자극적인 맛에 길들어 삶의 참된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게 된 슬픈 상태를 의미합니다.

 

‘불닭볶음면’이 주는 매콤하고 강렬한 맛에 길든 요즘 아이들은 ‘봄동 배추전’이 지닌

자연 본연의 고소한 그 깊은 맛을 알지 못합니다.

그 참된 맛을 모르기에 찾지 않게 되고 자극적인 맛들만 찾다가 위도 장도 다 버리게 되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이 주는 자극적인 위로를 지금 당장 받겠다고 조바심을 내기보다,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위로의 맛을 제대로 느끼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결국 참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는 비결은 행복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있습니다.

우리는 행복을 욕망하는 사람이 아닌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행복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은 ‘더 더 더’에 집착합니다.

지금 충분히 행복한데도 더 큰 행복을 찾습니다.

그러다 보니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속적인 가치들로 남들보다 ‘비교우위’에 서서 자신이

‘더 행복한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행복을 욕망하고 집착하느라 그 행복을 지금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나 불행 속에서 살게 될 뿐입니다.

반면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지금 자신이 충분히 행복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감사할

줄 알기에,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통해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을 믿기에

완전한 행복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갑니다.

그런 사람을 두고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msn036.gif [말씀묵상]  

      척박하고 가난해도, 내 옆의 주님 믿기에

            김기현 요한 세례자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영성지도 담당)

 

오늘 독서와 복음을 보면서 광야의 척박함과 세상에 대한 가난함이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로 향하게 하고, 주님의 부르심에 조금 더 가볍게 응답할 수 있게 해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함이 복되고 행복하다고 하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한국에 있을 때 스스로 조금 바쁘게 지내려고 했었습니다.

젊어서 힘도 있고 일하는 것이 재밌었기 때문입니다.

사제관 칠판에 할 일들, 공부할 것들, 그리고 참여해야 하는 교육이나 세미나들을

많이 적어 놓고 실행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일에 대한 고민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은 아침에 성당에 가서 성체조배를 하는데,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고민하고

있던 일에 대한 생각과 계획들이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아마 ‘성당 창호 공사를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던 때였는데요.

이런저런 구상들을 해보다가 문득 마음속에서 ‘내가 어떤 일을 계획하면서도 예수님의

생각은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물어보지도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많아서인지, 예수님은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나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광야의 메마른 곳

몇 년 전에 피정 지도 신부님이 제 외국 생활을 광야로 표현해 주신 적이 있는데요.

낯설고 뭔가 할 수 없다는 느낌이 많았던 곳에서 체험한 것이 있습니다.
처음 6개월 동안은 힘들었습니다.

스스로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저를 압박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예를 들면 외국어 학원 광고를 많이 봐서인지, 6개월이면 원어민처럼 다른 나라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조급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또 외국에 나가면 평화방송 미션에 나오는 것처럼 가난한 사람도 돕고 건물도 짓는 줄 알았습니다.

어떤 가시적인 성과나 결과가 눈에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는데요.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모습과 상황을 보게 되니까 잘 받아들여지지가 않았습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압박하고 뭔가 찾아서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모습이 많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스트레스 때문인지, 아니면 면역력 결핍 때문인지 원형 탈모도 있었습니다.

6개월 정도 지나서야 내 생각의 틀이나 고정관념이 스스로를 힘들게 하고 있음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기도를 하면서 ‘외국 생활은 이래야 한다’는 생각의 틀을 하나씩 내려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 내려놓았을 때는 내가 움켜쥐고 있는 생각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각이

무엇일지를 생각하고 향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선이 내 생각과 의지가 아니라, 그분이 바라시는 것을 바라보고 향하는

느낌이 들었을 때, 마음이 참 편해졌었습니다.

물론 그 일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생각이 그리로 향한 자체로 다른 기대나 집착이나

욕심과 같은 불순한 생각들이 놓아지고, 바른 자리에 다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막 교부의 금언 가운데 “흔히들 사막을 끝없이 이어지는 수평의 연속으로

생각하지만, 그곳에는 수직으로 상승하는 것들이 있다”는 글귀를 읽은 적이 있는데요.

제가 경험한 낯선 곳에서도 시선이 주님께로 들어 올려지고 향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브라이언 안 ‘산상설교’.

 

물가에 심긴 나무

외국에 살면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또 스스로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자주 깨닫게 됩니다.

조금 얄미운 느낌이지만, 내가 할 수 없음을 고백할 때 비로소 그분을 찾고 그분에게 시선이 갑니다.

물론 처음에는 원망하는 느낌도 있었고, 질문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는 현지에서 살아가고 있는 분들에게서 자주 듣는 그 ‘현존’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었습니다.

머리로는 조금 이해했지만 마음과 삶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답답함이 밀려왔을 때, 다른 지역 수녀님들께 가서 며칠 함께 지내며 성지 순례도

하고 같이 기도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루는 수녀님들과 저녁기도를 하고 성체현시를 했는데요.

성체를 한참 바라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기 감실에 계신 예수님도 무언가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현존하시는구나. 우리와 함께 현존하시면서 위로도 주시고 일하게도 하셨구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 존재하는 느낌이 무엇인지 살짝 체험되었습니다.

그러한 빛이 살짝 비춰왔을 때,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느낌이 들면서

‘여기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께 시선을 들어올리고, 그분의 삶의 방식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면, 물가에

심겨지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예레 17,7-8)

오늘 하루, 나는 세상에 대한 부유함으로 시선도 걸음도 옮길 수 없는 상태인지,

아니면 세상에 대한 가난함으로 가볍게 시선과 발걸음을 주님이 부르시는 대로 옮길

수 있는지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msn008.gif [호기심으로 읽는 성미술]

              십자고상 (상) 2~6세기 

       십자가의 예수님, 고통보다는 승리자의 당당함 드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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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교회 미술에서는 십자고상 작품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십자가를 지고 있는 어린양의 모습으로 주님의 십자가 수난을 표현했다.

사진은 이탈리아 몬테 산 올리베토 수도원 벽을 장식하고 있는 십자가

깃발을 지고 있는 어린양의 형상.

 

 

십자가 지고 있는 어린양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은

그리스도인들은 지상에 교회를 세우고 승리와 희망의 그림으로 그 내부를

장식했습니다.

주님의 수난을 표현할 때도 십자가 상의 죽음보다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즐겨 그렸습니다. 

 

이 시기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십자가형을 받고 처형된

자를 신으로 섬길 수 있느냐”며 모독하는 일이 흔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 매달려 수난당하시는 주님의 비참한

모습을 표현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십자고상(十字苦像) 작품은 초기 교회 미술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신 이 시기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지고 있는 어린양’의 모습으로

주님의 십자가 수난을 상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어린양은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희생된 속죄 제물로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파스카의 어린양입니다.

이 파스카의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히브 10,10)라는 성경 말씀을 되새기게 합니다. 

 

박해시대 그리스도인의 표식으로 몰래 사용되던 십자가가 그리스도교의

상징으로 세상에 처음으로 공개된 때는 312년 로마 테베레 강 밀비오 다리 전투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군대가 벡실리움(vexillium, 군기)과 방패에 십자가를

그리고 전장에 나가 막센티우스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이후 십자가는 로마군의 표식이 되었습니다.

이 십자가를 ‘키로’(Chirho) 십자가라고 합니다.

헬라어 ‘Χριστοs’(크리스토스)의 앞 두 글자를 붙인 형태입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는 예루살렘 골고타에서

주님의 성 십자가를 발굴한 후 주님 무덤 성당’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성 십자가를 비롯한 예수님 관련 성물과 골고타 흙을 가져와

로마에 예루살렘 성 십자가성당을 봉헌하자 십자고상을 주제로 한 성미술이 빠르게 확산하였습니다. 

 

십자고상 성미술 작품은 아마도 로마를 중심으로 유행한 듯합니다.

십자고상을 주제로 한 오래된 성미술품들이 모두 로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가장 오래된 십자고상 작품은 420~430년께 로마에서 상아로 만든

장식함 조각판입니다.

대영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이 돋을새김 조각판은 두 죽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을 배반한

유다 이스카리옷의 죽음입니다.

 

이 부조에서 십자가 상의 예수님은 양손에만 못이 박혀 있습니다.

두 발에는 아무런 상처가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머리 위 죄명 판에는 유다인들의 왕을 뜻하는 라틴어 

‘REX IVD’가 적혀 있습니다.

부조 맨 오른편에는 로마 병사가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고 있습니다.(요한 19,34) 

4세기 작품 「빌라도 행전」(Acta Pilati, 니코데모 복음이라고도 부름)은

이 로마 병사가 복음서에서 십자가 상의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고 고백한 백인대장(마태 27,54)으로

그의 이름은 론지누스(Longinus)라고 밝힙니다.

 

또 13세기 이탈리아 제노바대교구장 야고보 다 바라제 대주교는 저서

「황금전설」에서 백인대장 론지누스는 이후 세례를 받고 복음을 선포하다

58년 소아시아 카파도키아 카이사리아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조각판 가운데 십자가 아래에는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 사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맨 왼편 나무에 목을 맨 이가 유다 이스카리옷입니다.

그의 발아래에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몫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수석 사제

카야파에게 받은 은돈 서른 닢이 흩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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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또 다른 십자고상 작품 한 점을 소개합니다.

바로 430년께 만들어진 로마 성 사비나성당(Basilica Sanctae Sabinae)의 나무문 조각입니다.

돋을새김 부조인 이 작품에는 십자가 상의 예수님과 그 좌우로 두 죄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두 죄수는 모두 두 팔을 벌린 채 기도하는 ‘오란테’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성 사비나 성당은 재의 수요일에 머리에 재를 얹는 예식을 처음으로 거행한 곳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재의 수요일이면 교황이 사비나 성당을 순례하고 이곳에서 재를 얹는 예식을 주례합니다. 

 

앞의 장식함 부조와 성 사비나성당 부조의 예수님 모습을 자세히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작품의 예수님 얼굴에서 고통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모두 죽음을 이기신 승리자의 모습으로 당당합니다.

5세기 초반이면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됐을 때인데 왜 그때까지

승리자이신 주님의 모습으로 십자고상을 표현했을까요? 아마도 이 시기 서로마

제국을 위협하던 게르만 민족을 비롯한 많은 이민족의 침입을 그리스도 승리의

십자가로 이겨내고자 하는 신앙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정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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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예수상은 차이점도 있습니다.

상아 장식함의 예수님 얼굴은 긴 머리에 수염이 없는 건장한 청년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은 그리스 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여러 번 설명했습니다.

반대로 성 사비나 성당의 예수님은 긴 머리에 수염을 풍성하게 기르고 있습니다.

시리아와 그리스풍의 혼합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벗은 몸에 익숙했으나 시리아 사람들은 성 육신의 맨몸을

드러내는 일은 주님께 대한 모욕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십자고상의 예수님을 그릴 때도 긴 옷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도상이 이탈리아 피렌체 라우렌시아나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6세기 시리아 에데사 교회 라불라 주교의 복음서 필사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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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고상의 예수님이 긴 옷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돼 있다.

그림은 시리아 에데사 교회 라불라 주교의 복음서 필사본 중 일부,

6세기, 이탈리아 피렌체, 라우렌시아나도서관. 

 

박해시대 초대 교회 때부터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던 5세기 말 고대 교회 시대 때까지

십자고상을 주제로 한 성미술은 주님의 수난보다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승리자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 가톨릭평화신문 -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msn036.gif 교황님 말씀 - 복음에 충실한 우리 삶은 하느님으로 가득 찹니다

저는 마음을 일깨우는 말씀에 충실하고 ‘오늘’에 여전히 충실한 복음 선포자들과

설교자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오늘’을 살도록 이분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성령의 감미로운 힘이 성경을 살아있게 합니다. 실제로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히브 4,12 참조),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의 일상사를 비추며,

위안을 주고, 질서를 잡아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어떠한 일상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오늘’로

바꾼다는 점을 기억합시다.

그러니 복음서를 집어들어 날마다 짤막한 구절을 읽고 다시 읽읍시다.

 

-출처 : 바티칸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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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체 소식        

* 본당 신부님 주중. 주일미사 강론은 홈페이지 '토막강론'에서 보실 수 있으십니다.

 

▣ 2월 21일(월)~23일(수) 까지 랄리 교구 사제회의에 참석하시므로 2월23일 수요미사는 없습니다.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 3월2일 재의 수요일에 사용 할 성지가지를 2월27일 주일 미사까지 수거 합니다.

수거함은 하상홀 입구에 마련 되어 있습니다.

▣ 2022년도 BAA(Bishop's Annual Appeal)   

1. 교구청에서 우편으로 BAA를 받으신 분은 용지에 기재하셔서 직접 우편발송 하셔고 되고

2. 성당에 나오시는 분은 BAA 봉투를 봉헌함에 봉헌 (빈 봉투 성당에 비치)

3. 체크로 보내시고자 하시는 분은 편영준 미카엘형제님께 우편발송

4. 또는 온라인으로 직접봉헌 - GivetoBAA.org (저희 본당 고유번호는 614 입니다)

 * BAA Tax 공제는 저희 본당과는 무관하고 교구청에서 직접 발송됩니다.

▣ 2021년 텍스보고 안내

2021년 Tax Form은 예년처럼 e-mail로 (전자우편) 보내드릴 예정이오니

필요하신분들께서는재무분과장 편영준 미카엘형제님이나 각 구역장님께 

세대주 이름과 영문이름을 함께 신청 해 주시기 바라며, 신청하시는분들께만 발송 할 예정입니다.

이메일 신청은giving.spjcc@gmail.com  

▣  "공현스티커" 배포

성당 입구에 "공현스티커" 를 배치 해 두었으니 미사 때 오셔서 필요하신 만큼 

가져가십시요. 

※ 사용법: 주로 드나드는 현관 위 문틀이나 문 자체에 스티커를 붙입니다.

(손가락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려 붙이기, 나중에 페인트 벗겨짐에 주의)

▣  전세계적으로 오미크론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CDC에서는 오미크론에 천 마스크나 덴탈용 마스크는 면역력이 떨어지므로, KF 94

등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성체를 영하실때에도 차례로 격리거리 유지하여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사 참례 하고자 하시는 교우 여러분들은 안전한 환경 안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협조 부탁 드립니다. 

▣  점차 심해지는 변형 코로나19의 빠른 극복을 위해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기를 바라며, 성당내의 부엌사용과 모임을 자제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  성전안에서 미사 전, 미사 후 잡담을 삼가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시는분들을 위하여 성전밖으로 나가셔서 대화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  2022년 2월 매일미사책이 도착했습니다. 

정기구독 하시는 분들은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성당입구에 있으며 각 권구입은 $7 입니다.    

▣  매일미사책 공지 사항 - 2022년도 구독신청 받습니다.

매월 각권은 $7 이며, 각 권 구입시 4월미사책은 $10 입니다.

정기 구독료는  신청 개웙 x $7 하시면 됩니다.

신청하시는 방법은 아래 봉헌금내시듯 여러방법으로 신청하시면 되겠습니다.    

▣  알림: 본 성당주보에 교우들과 함께 나누고싶으신 글이나 알리고싶으신 글 있으시면 언제나 보내주십시요. 

보내실곳은 성당 총무부 방정모 요한형제님( johnbang74@gmail.com)께 접수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단, 특정 이슈가 되는 글은 편집 삼가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  Zarama 주교님 권한으로 COVID-19 동안 신자들은 주일 미사 참여 의무를 면제 받았습니다.  

 교무금, 건축헌금, 주일헌금 등 봉헌금은 미리 준비하셔서 성당 입구에서만 수합 합니다.  

단, 미사예물은 미사 전에 직접 제대에 올려 주십시요.

▣ COVID19으로 본당 미사에 직접 참여를 못 하시는 분들께서는 교무금, 건축헌금, 주일헌금 등     

앞으로는 세가지중에 편하신 방법으로 알아서 결정 하시면 되겠습니다.

    1. 미사 참여시 직접 전달

    2. 우편이용 봉헌 -  체크를 본당 재무분과장 편영준 미카엘형제님께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Pay to the order of : SPJCC (주소는 각구역장님께 문의)

    3. 인터넷이용 봉헌 - https://spjcc.weshareonline.org  

현재 교무금, 건축헌금, 감사헌금 및 주일헌금을 봉헌하실 수 있으며 매달 원하시는 

주기로 자동결제되도록 예약하실 수도 있습니다

처음 봉헌하실 때 계좌를 만드시면 그 후로는 간단하게 사용하실 수 있으며 봉헌 내역도 

확인 가능합니다. 사용 문의사항은 재무분과로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봉헌하시는 교무금안에는 저희 성당건물 모기지는 포함 하지 않고 있습니다. 

세금혜택은 총 봉헌금으로 받으시기 때문에 건축헌금에 비중을 두시는것도 저희 건물 빚을 갚는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어렵고 불편한 환경에서도 봉헌금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  코로나19 이후로 봉헌하시는 체크는 경우에 따라 디파짓이 조금 늦어질 수 있음을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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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님의 2월 기도 지향}  

일반: 여자 수도자들과 축성 생활자들

여자 수도자들과 축성 생활자들의 사명과 용기에 감사하며, 우리 시대의 도전들에 대한 

새로운 응답들을 끊임없이 찾도록 그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 미사 방송 보기    

 

1.가톨릭평화방송 매일 미사 시청   

    http://www.cpbc.co.kr/TV/178/  

    굿뉴스 가톨릭미디어 매일미사

     https://youtu.be/s7L4ANeePVU - 2.13. 2022

   

 

2. 미국 가톨릭 방송(EWTN)에서 매일 미사 시청   

     https://www.youtube.com/channel/UCijDos-LUTh9RQvSCMQqN6Q

     https://youtu.be/6iFXocXVkak - 2.13. 2022

     

 

3. 랄리 주교좌성당 미사    

     Holy Name of Jesus You Tube Channel 

     https://youtu.be/KLV8AfHJgIo - 2.13. 2022

 

 

4. VATICAN MEDIA LIVE 

     https://youtu.be/JuRrQgW5J4Y​​​ - Live

     https://youtu.be/2xFEfRg0wCw - 2022년 2월9일 프란치스코 교황님 수요 가르침 말씀 '평안을 죽음을 맞이하도록 도와주시는 임종자들의 주보 성 요셉​'

 

 

 

그분은 정의와 공정을 사랑하시는 분. 주님의 자애가 땅에 가득하네. 시편(33장 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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