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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당주보입니다.

(녹) 연중 제5주일 2022년 2월 6일

AdelaKim Adela 2022.02.02 07:30 조회 수 : 144

랄리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 

ST. HA-SANG PAUL JUNG CATHOLIC CHURCH 

주임신부: 이동욱 (도마)  

3031 Holland Rd Apex, NC 27502      Tel: (919) 363-0408      Fax: (919) 363-0409

입당송

어서 와 하느님께 경배드리세. 우리를 내신 주님 앞에 무릎 꿇으세.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네.

제1독서  이사  6,1-2ㄱ.3-8

화답송

◎ 주님, 천사들 앞에서 찬미 노래 부르나이다.
○ 주님, 제 마음 다하여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제 입의 말씀을 들어 주시기에, 천사들 앞에서 찬미 노래 부르나이다. 거룩한 성전 앞에 엎드리나이다. ◎
○ 당신은 자애롭고 진실하시니, 당신 이름 찬송하나이다. 제가 부르짖던 날, 당신이 응답하시고, 저를 당당하게 세우시니, 제 영혼에 힘이 솟았나이다. ◎
○ 주님, 세상 임금들이 당신 말씀 들을 때, 저들이 모두 당신을 찬송하게 하소서. 주님 영광 크시오니, 주님의 길을 노래하게 하소서. ◎
○ 주님은 오른손으로 저를 구하시나이다.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리라! 주님, 당신 자애는 영원하시옵니다. 당신 손수 빚으신 것들 저버리지 마소서. ◎

제2독서  1코린  15,1-11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리라.◎

복음  루카  5,1-11

영성체송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자애를, 사람들에게 베푸신 그 기적을. 그분은 목마른 이에게 물을 주시고,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네.

 


 생명의 말씀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구요비 욥 주교 | 서울대교구 보좌주교

                               

우리 한국인의 정신적이고 문화적인 뿌리는 유학(儒學)이며 유학이 제시하는

인간상은 성인군자(聖人君子)가 되는데 있습니다!

그 여정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로 요약됩니다.

 

공자(孔子)님은 “하루 동안이라도 사욕을 이겨 예(禮)로 돌아가면 천하가

인(仁)으로 돌아간다. (一日克己復 禮, 天下歸仁焉)”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다시 수신(修身)이 강조되는데 이는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고 내면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줍니다.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양심(良心)을 통해 인간에게 다가오는 양지(良知)를

얻는 길을 격물치지(格物致知 : 사물의 이치를 투철하게 밝힘)라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교가 제시하는 인간관은 어떠합니까?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체험한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며 이 하느님의 성성(聖性)

앞에 인간은 자신이 초라한 죄인(罪人)임을 뼈저리게 통감합니다!

지극히 선(善)하신 하느님은 당신의 거룩함(聖性)을 인간에게 나누어주고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의 성화(聖化)를 위하여 인간의 협력, 곧 인간이 당신의 일꾼으로

파견되기를 바라십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인

은총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의 성화(聖化)를 이룩한다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1코린 15,10) 이런 면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라!”(루카 5,5)라는 말씀의 의미를 묵상해 봅시다!

철학자 루이 라벨(Louis Lavelle)은 “성인들의 거처는 바로 이 세상의 내면성(intimité)”

이라고 통찰합니다.

 

이 내면성은 정신적인 존재인 인간이 자기 자신과 존재하는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대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자기 자신과 존재하는 사물들의 본질 자체를 직접 대면하고 대화 하는 것이 영적인 삶입니다.

이 내면(intimité) 안에 머무름은 인간의 내적인 삶을 말합니다.

 

우리 속담에 “열 길 물속은 알 수 있어도 한 길 사람의 마음속은 알 수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가고 침잠할 때 우리 안에 내재해 계신 주님을 만날 수

있고 그분의 음성과 그분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깊은 곳으로 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고요와 침묵 가운데서

우리의 내면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우리를 촉구합니다.

 

또한 이 말씀은 이 세상 안에서 사회적인 존재로서 살아가며 내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msn035.gif  [생활속의 복음]         

                      ‘뼈 때리는’ 경고      

                               함승수 신부(서울대교구 수색본당 부주임)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맡길 예(預) 자에 말씀 언(言) 자를 써서 ‘하느님께서

맡기신 말씀을 대신 전함’이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또한 ‘예언’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를 위하여’라는 뜻의 전치사에

‘말하다’라는 뜻의 동사가 더해진 합성어인데,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누구를 위하여

말하다’라는 뜻이 됩니다.

즉 그 말을 듣는 사람을 진정으로 위하는 마음으로, 때로는 듣기 불편한 말일지라도 전해야만 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에서 ‘예언자’로 사는 것은 참으로 힘든 소명이었습니다.

 

특히 모두가 슬프고 어려운 일을 겪느라 힘든 시기에 잘못을 바로잡지 않으면 더

힘들고 괴로운 일이 닥칠 거라는 메시지를 전해야 할 때엔 동족들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거나 때로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오늘의 제1독서에 나오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암울한 시기에 하느님의 뜻을 전하다 이방인들에게는 조롱을, 동족들에게는 박해를 받습니다.

생의 마지막에는 이집트로 끌려가던 길에 동료들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전해집니다.

슬프고 가혹한 소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는 과정에서 겪으셔야 했던

어려움과 고통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과 뜻을 분명하게 전하셨지만,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고향 마을 사람들은 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는 그분의 출신과 가정환경을 토대로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

결론짓고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무시하고 거부한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이 하는 말, 배움의 끈이 짧은 이가 하는 말, 허물을 가진 이가

하는 말에는 귀를 막아버립니다.

자기가 그 사람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아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왜곡과 편견일 뿐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이 진실하지 못할 때, 주님에 대해 아는 극히 일부분의 사실로

그분에 대해 성급하게 판단할 때, 우리는 믿음의 내용과 목표보다는 당장

눈에 보이는 ‘잿밥’에 더 관심을 갖게 됩니다.

나자렛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께 눈에 보이는 놀라운 기적을 요구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런 요구를 직접 발설하진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이미

훤히 꿰뚫어보고 계셨습니다.

‘네가 카파르나움이라는 고을에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는 놀라운

기적들을 많이 일으켰다던데, 우리에게도 그런 기적이나 한번 보여줘 보아라.

그러면 네가 별 볼 일 없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진짜 예언자라는 것을 믿어줄 테니….’

 

정해진 요구사항을 충족시켜주면 믿어주겠다는 마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그들은 ‘믿음’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로 자신들의 욕심과 호기심을 채우려 할 뿐입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놀라운 기적들을 보여주신다 해도 그들은 믿을 수 없는 이유를 먼저 찾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잘 아셨기에 그들 앞에서 아무 기적도 일으키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구약의 아픈 역사를 인용하여 그들의 ‘뼈를 때리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이 인용하신 두 가지 이야기의 공통점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고통을 겪고 있던

그 시기에 하느님께서 ‘이방인’을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신 것은 그들에게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시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선포하신 구원의 메시지가 이방인들을 통해 실현된 것은 그들이 그 말씀을

제대로 듣고 따랐기 때문임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었지요.

자신들은 하느님께 선택받은 특별한 민족이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그분의 뜻을 알고도

그 뜻에 맞게 자기 삶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구원은 언제나 ‘남의 일’이

될 뿐이라고 유다인들에게, 오늘 복음을 듣는 우리에게 엄중히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msn036.gif [말씀묵상]  

      온갖 난관에도 복음 전파 첫길 굳게 걸으신 주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살레시오회)

 

배척과 위협 앞에서 홀연히 길 떠나시는 예수님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 예수님께서는 이제 본격적인 공생활이자 사목활동을 시작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와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한 당신 사명이

최초로 시작되는 장소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저 같았으면 아마도, 당대 제일 잘 나가던 도시, 로마나 아테네, 예루살렘이나

안티오키아 같은 대도시에서 거창하게 시작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대통령 취임식이나 창당대회 하듯이 멋지게 무대도 꾸미고, 각계 주요 인사들도 초대할 것입니다.

프로그램도 알차게 짜고, 사회자가 진행도 하고, 그리고 마침내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 포부도 밝히고….

그러나 웬걸,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장소는 당시 유다 주류 세력들이 멸시하고

못마땅하게 여기던 갈릴래아 지방이었습니다.

사실 갈릴래아는 팔레스티나에서 비옥한 토지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자연스레 외침이 잦았습니다.

틈만 나면 이민족들에게 점령당하고 착취를 당해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라고까지 불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갈릴래아는 잦은 민중 봉기로 유명했습니다. 따라서 갈릴래아는 유다

고위층 인사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지역이었던 것이지요.

갈릴래아에는 비옥한 농토로 인해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백성들의 삶이 윤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작농이거나, 하루하루 일당 받아 생계를 유지하던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첫 발걸음은 천대받고 무시당하던 지역 갈릴래아 지방을 향했고,

드디어 당신의 고향 나자렛에 이르렀습니다. 청년으로 성장하기까지 어린 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 호형호제하던 사람들, 사랑했던 사람들, 고마운 인연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을 것입니다.

다양한 감정들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동시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고향 사람들에게도 꼭 전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다른

고을에서보다도 훨씬 강도 높게 복음을 선포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향 사람들의 반응이 시원찮았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크게 감동을 받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저 사람은 우리 집 건너편에 살던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삼십 년 동안 해온 일이라곤 고작 톱질이요 대패질뿐이었는데” 하면서 도무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냉랭하면서도 완고한 고향 사람들의 태도 앞에 예수님께서도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차근차근 친절하게 설명해도 끝끝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수용하지 않는 고향

사람들의 소극적인 자세 앞에 예수님께서는 태도를 바꾸십니다.

적극적인 강공 모드로 돌변하십니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루카 4, 25~26)

 

‘나자렛 회당에서 가르치는 그리스도’ (이콘)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이라는 자부심이 엄청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으시고 거침없이 말씀하셨습니다.

대기근이 들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 잘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외면하시고, 한 이방인에게

먼저 극진한 사랑을 베푸셨음을, 수많은 이스라엘의 나병 환자들은 제쳐두고

이방인 나병 환자를 치유해주셨음을 상기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은 유다인들에게 크나큰 수모요 상처였습니다.

그들은 화가 잔뜩 나서 길길이 뛰고 이를 갈면서 손을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작당한 그들은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살해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우르르 예수님을

향해 몰려든 그들은 일단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몰았습니다.

소나 돼지 몰듯이 말입니다.

깎아지르는 절벽까지 예수님을 끌고 간 그들은 거기에서 예수님을 떨어트려

추락사시키려고 안간힘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예수님의 지혜로움과 민첩함이 크게 돋보입니다.

하실 말씀 시원하게 다 하신 예수님, 유다인들의 속을 긁어 놓을 데로 다 긁어놓은

예수님께서는, 위기 상황이라는 것을 인식하시고, 재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나신 후

홀연히 당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가장 밑바닥에서 시작하신 예수님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구원자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셨지만

동족으로부터 환영은 고사하고, 협박당하고 벼랑 끝까지 내몰리고, 죽음의 위협을 받으셨습니다.

정말이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역 중에도 이런 반역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고향 나자렛 사람들의 배신과 반역 그 이면에 어떤 생각들이 자리 잡고 있었을까 묵상해봤습니다.

예수님이란 인물이 자신들의 기대에 완전히 어긋나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실 때 구름을 타고 내려오실 줄 알았습니다.

휘황찬란한 옷을 입고 오실 줄 알았습니다.

손가락 하나로 세상을 바꿀 능력의 주인공으로 오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자신들의 눈앞에 나타난 메시아의 모습이라니! 자신들과 동고동락했던 목수의 아들입니다.

자신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꼬질꼬질 때 묻은 삶을 살아온 일개 청년의 모습입니다.

오랜 세월 기다려왔던 메시아의 메시지를 예수님께서 선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어떠한 지상적 번영도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무소불위의 권력이나 물질적인 부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함에 대해서도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물리치셨던 세 가지 유혹, 빵, 기적, 권세 이런 것들을 간절히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향해 지니고 있는 바람이 무엇인가 돌아봅니다.

혹시라도 그 옛날 나자렛 고향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 사명의 첫출발이 믿음이 많이 부족한 보잘것없는 동네에서 시작됐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사명의 첫출발이 환호와 박수갈채가 아니라 철저한 냉담함과 극도의 반대 속에,

다시 말해서 완전 밑바닥에서 시작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msn008.gif [성화로 만난 하느님]

                   ‘그리스도의 형상’

신성과 인성, ‘그리스도의 위격’을 보여주다

 

우주의 통치자 상징하는 모습

그리스도 이콘 중 가장 오래돼

왼쪽 눈엔 엄격함이, 오른쪽 눈엔 온화함이

세 개 손가락은 삼위일체

두 개는 하늘 땅 의미해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묻자, 시몬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대답했다.

그리스도는 구약시대에는 ‘육신이 없는 말씀’으로 존재했지만, 신약시대에는

‘육신이 되신 말씀’으로 이 세상에 들어오셨다.

칼케돈 공의회(451년)에서는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느님이며 완전한 인간이라고

교회의 기본 교리를 선언했다.

 

‘섞일 수 없고, 변할 수 없고, 나뉠 수 없고, 분리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신적인 면과

인간적인 면은 그리스도를 형상화하는 가능성을 열었다.

요한 1서의 첫 구절인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이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는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할 수 있다.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우리가 형상으로 만드는 분은 육신으로 오시어 지상에 보이셨고,

형언할 수 없는 선하심으로 사람들 가운데 사셨고, 육신의 본성과 두터움과 형태와 색깔을

취하신 육신이 되신 하느님, 바로 그분이다”라고 말한다.

이렇듯 성화(聖畵)에서는 말씀이 사람이 돼 오신 참 하느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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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토크라토르’, 6세기경, 납화법, 이집트 시나이 성 가타리나 수도원.

 

 

msn036.gif 교황님 말씀 - 하느님께서 우리의 실존적 광야에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놀라게 하십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연관짓는 권력이나 큰 세력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작음과 겸손을 선호하십니다.

 

구원은 예루살렘, 아테네, 로마가 아니라 광야에서 시작합니다.

이 역설적인 전략이 우리에게 매우 아름다운 메시지를 줍니다.

곧, 권위 있고 교양 있고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것이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실제로 교만과 하느님에 대한 거부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내면은 가난해야 합니다. 광야가 가난한 것처럼 말입니다.

 

-출처 : 바티칸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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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체 소식        

* 본당 신부님 주중. 주일미사 강론은 홈페이지 '토막강론'에서 보실 수 있으십니다.

 

▣ 이동욱 도마 본당신부님께서 2월7일(월)~2월11일(금) 북미 동남부사제 협의회에 

참석하시므로 2월9일 수요미사가 없음을 알려 드립니다. 

아울러, 2월 21일(월)~23일(수) 까지 랄리 교구 사제회의에 참석하시므로 2월23일 수요미사 또한 없습니다.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성서모임 모집안내

창세기 성서모임 형제님반  모집합니다 

신청:  2022년 2월 6일까지

모임: 소모임으로 줌미팅 진행

자세한 문의는 최 아네스 자매님께 (919 741 0902)

▣ 전례부에서 부활초 도네이션 받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 2022년도 BAA(Bishop's Annual Appeal)   

1. 교구청에서 우편으로 BAA를 받으신 분은 용지에 기재하셔서 직접 우편발송 하셔고 되고

2. 성당에 나오시는 분은 BAA 봉투를 봉헌함에 봉헌 (빈 봉투 성당에 비치)

3. 체크로 보내시고자 하시는 분은 편영준 미카엘형제님께 우편발송

4. 또는 온라인으로 직접봉헌 - GivetoBAA.org (저희 본당 고유번호는 614 입니다)

 * BAA Tax 공제는 저희 본당과는 무관하고 교구청에서 직접 발송됩니다.

▣ 2021년 텍스보고 안내

2021년 Tax Form은 예년처럼 e-mail로 (전자우편) 보내드릴 예정이오니

필요하신분들께서는재무분과장 편영준 미카엘형제님이나 각 구역장님께 

세대주 이름과 영문이름을 함께 신청 해 주시기 바라며, 신청하시는분들께만 발송 할 예정입니다.

이메일 신청은giving.spjcc@gmail.com  

▣  "공현스티커" 배포

성당 입구에 "공현스티커" 를 배치 해 두었으니 미사 때 오셔서 필요하신 만큼 

가져가십시요. 

※ 사용법: 주로 드나드는 현관 위 문틀이나 문 자체에 스티커를 붙입니다.

(손가락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려 붙이기, 나중에 페인트 벗겨짐에 주의)

▣  전세계적으로 오미크론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CDC에서는 오미크론에 천 마스크나 덴탈용 마스크는 면역력이 떨어지므로, KF 94

등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성체를 영하실때에도 차례로 격리거리 유지하여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사 참례 하고자 하시는 교우 여러분들은 안전한 환경 안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협조 부탁 드립니다. 

▣  점차 심해지는 변형 코로나19의 빠른 극복을 위해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기를 바라며, 성당내의 부엌사용과 모임을 자제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  성전안에서 미사 전, 미사 후 잡담을 삼가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시는분들을 위하여 성전밖으로 나가셔서 대화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  2022년 2월 매일미사책이 도착했습니다. 

정기구독 하시는 분들은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성당입구에 있으며 각 권구입은 $7 입니다.    

▣  매일미사책 공지 사항 - 2022년도 구독신청 받습니다.

매일미사책 값이 두배로 올랐습니다.

2월 미사책부터 11개월 $70, 6개월 $35,  매월 각권은 $7 입니다.

신청하시는 방법은 아래 봉헌금내시듯 여러방법으로 신청하시면 되겠습니다.    

▣  알림: 본 성당주보에 교우들과 함께 나누고싶으신 글이나 알리고싶으신 글 있으시면 언제나 보내주십시요. 

보내실곳은 성당 총무부 방정모 요한형제님( johnbang74@gmail.com)께 접수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단, 특정 이슈가 되는 글은 편집 삼가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  Zarama 주교님 권한으로 COVID-19 동안 신자들은 주일 미사 참여 의무를 면제 받았습니다.  

 교무금, 건축헌금, 주일헌금 등 봉헌금은 미리 준비하셔서 성당 입구에서만 수합 합니다.  

단, 미사예물은 미사 전에 직접 제대에 올려 주십시요.

▣ COVID19으로 본당 미사에 직접 참여를 못 하시는 분들께서는 교무금, 건축헌금, 주일헌금 등     

앞으로는 세가지중에 편하신 방법으로 알아서 결정 하시면 되겠습니다.

    1. 미사 참여시 직접 전달

    2. 우편이용 봉헌 -  체크를 본당 재무분과장 편영준 미카엘형제님께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Pay to the order of : SPJCC (주소는 각구역장님께 문의)

    3. 인터넷이용 봉헌 - https://spjcc.weshareonline.org  

현재 교무금, 건축헌금, 감사헌금 및 주일헌금을 봉헌하실 수 있으며 매달 원하시는 

주기로 자동결제되도록 예약하실 수도 있습니다

처음 봉헌하실 때 계좌를 만드시면 그 후로는 간단하게 사용하실 수 있으며 봉헌 내역도 

확인 가능합니다. 사용 문의사항은 재무분과로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봉헌하시는 교무금안에는 저희 성당건물 모기지는 포함 하지 않고 있습니다. 

세금혜택은 총 봉헌금으로 받으시기 때문에 건축헌금에 비중을 두시는것도 저희 건물 빚을 갚는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어렵고 불편한 환경에서도 봉헌금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  코로나19 이후로 봉헌하시는 체크는 경우에 따라 디파짓이 조금 늦어질 수 있음을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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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님의 2월 기도 지향}  

일반: 여자 수도자들과 축성 생활자들

여자 수도자들과 축성 생활자들의 사명과 용기에 감사하며, 우리 시대의 도전들에 대한

새로운 응답들을 끊임없이 찾도록 그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 미사 방송 보기    

 

1.가톨릭평화방송 매일 미사 시청   

    http://www.cpbc.co.kr/TV/178/  

    굿뉴스 가톨릭미디어 매일미사

    https://youtu.be/rvG21py4xck - 2.6. 2022

 

 

2. 미국 가톨릭 방송(EWTN)에서 매일 미사 시청   

     https://www.youtube.com/channel/UCijDos-LUTh9RQvSCMQqN6Q

     https://youtu.be/86wAEQ77EUQ​ - 2.6. 2022  

 

 

3. 랄리 주교좌성당 미사    

     Holy Name of Jesus You Tube Channel 

     https://youtu.be/ED_jetMkUh0 - 2.6. 2022

 

       

4. VATICAN MEDIA LIVE 

     https://youtu.be/JuRrQgW5J4Y​​​ - Live

     https://youtu.be/xXYMYma09M0 - 2022년2월2일 프란치스코 교황님 수요 가르침 말씀 '모든 성인과의통공'

 

 

 

사랑하는 여러분, 우상 숭배를 멀리하십시오. 1코린(10장 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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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2 2023년 12월 10일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file DongsooBang Clare 2023.12.06 71
491 2023년 12월 3일 대림 제1주일 file DongsooBang Clare 2023.12.01 68
490 2023년 11월 26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성서 주간) file DongsooBang Clare 2023.11.24 51
489 2023년 11월 19일 연중 제33주일 (세계 가난한 이의 날) file DongsooBang Clare 2023.11.17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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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5 2023년 10월 22일 연중 제29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 주일) file DongsooBang Clare 2023.10.19 104
484 2023년 10월 15일 연중 제28주일  file DongsooBang Clare 2023.10.13 94
483 2023년 10월 8일 연중 제27주일 (군인 주일) file DongsooBang Clare 2023.10.06 86
482 2023년 10월 1일 연중 제26주일 file DongsooBang Clare 2023.09.28 70
481 2023년 9월 24일 연중 제25주일 file DongsooBang Clare 2023.09.22 66
48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 경축 이동 (2023년 9월 17일)  file DongsooBang Clare 2023.09.15 65
479 2023년 9월 10일 연중 제23일 file DongsooBang Clare 2023.09.08 65
478 2023년 9월 3일 연중 제22주일 file DongsooBang Clare 2023.09.01 67
477 2023년 8월 27일 연중 제21주일 file DongsooBang Clare 2023.08.25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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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5 2023년 8월 13일 연중 제19주일 file DongsooBang Clare 2023.08.11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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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3 2023년 7월 30일 연중 제17주일  file DongsooBang Clare 2023.07.27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