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시드니에서 있었던 세계 청년 대회(7월15일~20일)를 마치고 생드니 교구의 교구장이신 오영진(Olivier de Berranger) 주교님과 청년 120여 명이 프랑스로 귀국하는 길에 열흘 간의 일정(7월21일~31일)으로 한국에 들렀습니다. 1976년부터 17년간 서울 구로와 영등포에서 노동자들을 위한 사목을 하셨던 오영진 주교님은 청년들에게 한국 교회의 역동성을 보여 주고, 1800년대 조선에서 선교하다 순교한 프랑스 파리 외방 전교회 신부님들의 순교 정신을 그들의 마음에 심어 주고 싶었습니다. 평화방송․평화신문에서는 명동성당을 방문하는 날, 주교님과 두 명의 청년을 인터뷰하기로 했습니다.
방문단은 오전 덕수궁의 문화체험을 마치고 명동성당에 12시30분에 올 예정이었지만, 교통이 지체되어 오후 1시15분쯤 도착했습니다. 늦게 도착하신 주교님은 죄송하다며, 인터뷰와 방송 녹음을 하기 위해 길 건너편의 평화방송․평화신문 빌딩으로 빠른 걸음을 옮겼습니다. 방송실에 가기 전에, 승강기 안에서 제가 주교님께 말을 건넸습니다. 점심 식사를 아직 못하셨으니, 우리가 준비한 샌드위치를 먼저 드시고 인터뷰를 하시죠. 주교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저와 청년들이 우리 프랑스 선교사들의 순교 정신을 체험하러 왔는데, 그분들이 겪었을 고생과 고통에 비하면 점심 조금 늦게 먹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방송 녹음부터 먼저 합시다.
순교 정신으로 점심의 허기를 이겨 내자는 주교님의 생활에서 살아 숨쉬는 순교 영성은 방송 녹음과 신문 인터뷰가 끝난 후,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함께 나눈 대화에서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호주에서 세계 청년 대회 마치신 후 바로 한국에 들어오셔서 또 다시 강행군을 하시는데, 무척 피곤하시겠습니다. 파리 외방 전교회의 선교사들이 사제서품을 받고 젊은 나이에 모든 것을 버리고, 이역만리 이 곳 조선에서 신앙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바쳤던 것에 비하면, 우리들이 한국에서 열흘 간의 일정 동안 잠시 머무르면서 겪는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죠.
갈매못 순교성지 순례 감동을 잊을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 17년을 살았지만 갈매못 순교성지를 이번에 처음 가봤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용감하게 순교의 칼을 받은 다블뤼(Antoine Daveluy, 조선교구 5대 교구장) 주교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프랑스 청년들은 이번에 한국 천주교회 역사와 프랑스 선교사들의 순교를 생생하게 배우고 느꼈습니다. 방송국에 녹음을 하기 위해 함께 자리한 프랑스의 앳된 두 청년도 그 옛날 고국의 선교사가 동방의 이 먼 곳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의 피를 흘렸다는 사실에 놀라웠고, 자신들의 신앙 선조들을 본받아 어떠한 자세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깨달았다고 말했습니다.
이 땅에서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의 순교 정신이 이제 가톨릭 신앙의 종가라 할 수 있는 프랑스 젊은이들의 가슴에도 새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한국에서 체험한 순교 정신을 일상의 삶 안에서 살아내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모진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생명을 신앙의 제단에 바친 수많은 순교자를 신앙 선조로 모시고 있는 우리에게도 순교 정신이 삶의 현장에서 굳건히 이어지기를 희망합니다.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김영춘 베드로 신부 ㅣ 평화방송․평화신문 주간
-2008년 9월 21일 TKCC 주보 '생명의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