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멀어 앞을 못 보는 이가 어떻게 ‘나자렛 사람 예수’ 라는 한마디의 말을 듣고서 보이지도 않는 예수님을 향해 ‘자비를 베풀어 달라’ 고 소리를 지를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이 사람은 예전처럼 다시 보고 싶은 애태움 속에서도 듣는 것에 더 많이 익숙해져 있었나 봅니다.
다시 말해 보고자하는 움직임 가운데 들려지는 것을 듣는 고요함에 길들여져 있다고나 할까요. 바로 이러한 자기의 자리에서 소리 없는 소리로써 지나가시는 예수님과 상봉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는 꾸짖음에도 그의 마음자리는 분명했습니다.(48절) 깊은 밤 스치는 가을 바람 소리에도 곡식이 영근다는 이치를 말입니다. 즉 군중들의 비위를 거스른 듯 하면서도 그들이 예수님을 생각하는 그 마음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준비의 자리가 “그를 불러오너라”(49절)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들 자격이 된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그는 예수님이 부르시는 말씀을 근거로써 겉옷을 벗어 던질 수 있었고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50절) 여기서 보아야 할 것은 겉옷을 벗어 놓은 자리가 바로 넘어졌다 일어난 자리요 여태껏 인욕으로써 정진해 왔던 한 인간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이 소경은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아무것도 모른 체 하시는 예수님과 직접 대화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51절) 라는 물음 앞에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소리에 귀 기울여 주시는 사랑으로 응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다운 말이요, 예수님꺼서 말씀하시는 네 믿음(52절)인 것입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51절) 라고 말입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보여 주시는 말씀으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52절) 라고 하심으로써 말씀이 눈이 되시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만을 뜨게 해주시는 행위가 아닌 보이지 않는 것도 보게 되는 혜안을 얻게 해주신 것입니다. 바로 자신이 지금까지 입고 살아왔던 누더기 속에 하늘의 자비가 이미 품어져 있었음을 보게 되는 밝은 눈 말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가기는 가되 자신을 있게 한 그 본래의 길을 따라 나선 것이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 박갑조 세례자 요한 신부 ㅣ 맑은 하늘 피정의 집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