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경에서 보면 하느님께서는 항상 먼저 당신의 사랑을 표명하십니다. 예언자 호세아로부터 시작된 예언자 전승은 그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혼인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사랑에 관해 말하면서 그분의 사랑을 받는 자는 누가 되었든 간에 구체적인 행위로 응답해야 한다는 점을 한결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율법에서는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으며(레위 19,18) 요한 서간에서는 하느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라고 말합니다(1요한 4,8).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시기까지 인간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그러한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구체적인 행위로써 그분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를 사랑하고 계신 것처럼 그렇게 서로 사랑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오늘의 전례는 주님의 사랑을 살아가도록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예수님은 인간적이고 종교적인 거센 반대와 위협을 온몸으로 겪어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오만과 계산된 논리가 빚어낸 인간 욕심의 결정체인 십자가는 역설적으로 하느님 사랑의 심오한 성격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에 처형된 당신의 외아들을 죽음으로부터일으켜 세우심으로써 인간에 대한 당신의 무한한 사랑이 세상의 권세를 눌러 이기고 승리했음을 온 천하에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이 지배하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히셨을 뿐만 아니라 죄악이 막아놓은 당신과 인간 사이의 두터운 담을 헐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죽음마저도 무력화시키신,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심오한지를 마음속 깊이 새기게 됩니다.
문제는 과연 우리가 오늘의 현실 안에서 하느님께서 그렇게 마련해 주신 삶의 공간을 사랑이 넘치는 행복의 자리로 만들어 가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형제들이 함께 모여사는 것 자체를 행복하게 느낄 수 있는 세상이라야 사랑이 넘치는 세상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세상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인간 사이를 갈라놓는 두터운 불신과 뿌리 깊은 소통의 부재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조건 없이 진실한 사랑을 나누는 일입니다. 그러한 사랑은 이웃에 대한 배려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배려의 행위는 이웃을 향하는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관심어린 배려의 시선 속에는 사랑을 실천하려는 의지가 이미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웃에게 다가가기 위한 몸짓이 이웃을 배려하는 모습으로 표출될 때만이 주님의 사랑을 나누기 위한 구체적인 삶이 시작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 안병철 베드로 신부 ㅣ 서울대교구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