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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 신부님 교중 미사의 짧은 강론 버전 입니다.

연중 제33주일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2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 요약
“여기 가련한 이가 부르짖자 주님께서 들으셨다”(시편 34[33],7); 마태 25,1-13; ’18/11/18

1. 오늘날 우리는 고통과 소외의 다양한 상황들 안에서 살아가는 많은 형제자매들, 곧 우리가 대개 습관처럼 ‘가난한 이들’이라고 부르는 이들을 만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존엄이 짓밟혔지만 빛과 위로를 얻고자 힘을 내어 주님을 바라보는 이들의 부르짖음에 주님께서는 귀를 기울이십니다. 주님께서는 거짓 정의의 미명 아래 박해받고, 그러한 미명을 붙일 가치도 없는 정책으로 억압당하고 폭력으로 위협받는 이들에게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들은 자신을 구원해 주실 분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그 누구도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서 외면당했다고 느껴서는 안 됩니다. 흔히 부의 증진을 으뜸 목적으로 삼고 우리를 고립으로 이끄는 세상에서 특히 그러합니다.

2. 이 시편에서는 세 가지 동사가 나옵니다. 먼저 ‘부르짖다’가 나옵니다. 빈곤의 상황은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으나 하늘을 가로질러 하느님께 가닿는 부르짖음이 됩니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계획들은 그 자체로 가치 있고 필요하다 할지라도 실질적으로 가난한 이의 부르짖음을 알아차리기보다는 그 계획을 시행하는 이들의 자기만족을 위해 추진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3. 두 번째 동사는 ‘응답하다’입니다. 아브람은 자신과 아내 사라가 나이가 많아 자식을 가질 수 없었음에도 하느님께 자손을 갖고자 하는 소망을 아뢰었고 그때에 주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창세 15,1-6 참조). 모세가, 불에 타고 있지만 타서 없어지지 않는 떨기를 통해서 하느님 이름의 계시를 받고 이집트에서 주님 백성을 해방시키라는 사명을 받았을 때에도 그러했습니다(탈출 3,1-15 참조). 또한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광야를 떠돌아다니는 동안 내내, 곧 굶주림과 목마름에 지쳤을 때(탈출 16,1-6; 17,1-7 참조),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불충실하고 우상을 섬기는 최악의 비참한 상태로 타락했을 때에도(탈출 32,1-14 참조) 분명히 응답하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은 언제나 구원을 주시는 개입입니다. 그리하여 상처 입은 몸과 영혼을 치유하시고 의로움을 되찾아 주시며 품위 있는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하십니다. 어떤 형태로 어느 곳에 있든 가난한 이들이 자신들의 부르짖음이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4. 세 번째 동사는 ‘해방하다’입니다. 가난은 스스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이기심과 교만, 탐욕과 불의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만큼이나 오래된 악일 뿐 아니라, 늘 무죄한 이들까지 연루시켜 비극적인 사회적 결과를 초래하는 죄이기도 합니다. 해방하시는 하느님의 활동은 자신의 슬픔과 곤경을 하느님께 호소하는 이들을 향한 구원의 행위입니다.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권능이 가난의 굴레를 부수어 버리고 풀어 줍니다. 시편의 여러 편들은 가난한 이들이 각자 삶에서 만나는 이러한 구원의 역사를 노래하고 경축합니다. “그분께서는 가련한 이의 가엾음을 업신여기지도 싫어하지도 않으시고 그에게서 당신 얼굴을 감추지도 않으시며 그가 당신께 도움 청할 때 들어 주십니다”(시편 22[21],25). 하느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우정과 친밀함과 구원의 표징입니다. “당신께서 저의 가련함을 굽어보시어 제 영혼의 곤경을 살펴 아시고 …… 제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습니다”(시편 31[30],8-9). 가난한 이들에게 “넓은 곳”을 준다는 의미는, 그들을 “새잡이의 그물에서”(시편 91[90],3) 해방시켜 주고 길목에 숨겨진 덫에서 구출하여 그들이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평온한 마음으로 삶을 바라보게 해 줍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가난한 이를 향해 내미는 손의 모습을 띱니다. 이는 가난한 이들을 환대하고 보호하는 손, 그들이 필요로 하는 우정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손입니다. 이러한 구체적이고 뚜렷이 알 수 있는 친밀함에서 진정한 해방의 길이 시작됩니다. 

5. 저는 수많은 가난한 이들이 마르코 복음에 나오는 바르티매오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감동받았습니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마르 10,46) 예수님의 치유를 받습니다. 바르티매오는 자신에게 시력과 노동력 같은 기본 능력이 없음을 알고 있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오늘날 인류가 진보를 이루었음에도, 기본 생계 수단들의 부족, 일할 수 있는 체력이 떨어지는 데에서 비롯되는 소외, 다양한 사회적 노예 형태 등이 존재합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가난한 이들이 바르티매오처럼 길가에 앉아 자기 존재의 이유를 찾고 있습니까! 
가난한 이들은 궁핍한 자들일 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반경에서 유리되어 있고 결과적으로 거부하고 멀리해야 할, 불편과 불안을 몰고 다니는 자들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한 경향으로 가난한 이들과 우리 사이에 거리가 생겨납니다. 또한 그렇게 하여 우리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주 예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6. 가난한 이들은 가장 먼저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고 그분께서 그들 삶 안에 가까이 계심을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당신 약속에 충실하시기에, 밤의 어둠 속에서도 그분 사랑과 위로의 온기가 가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빈곤에 짓눌리는 상황을 극복하려면, 가난한 이들은 자신에게 관심을 쏟아 주고 마음의 문과 삶을 열어 자신을 친구처럼 가족처럼 느끼게 해 주는 형제자매들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 제사를 드린 다음에 잔치를 벌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한 공동체로 모여 기도하고 주일날 한 끼의 식사를 함께 나누는 것은 우리에게 첫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되새기게 해 주는 경험입니다. 

7. 빈곤이라는 거대한 세계 안에서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역량은 제한적이고 미약하며 부족합니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함께 협력하고 그 목표를 더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경험들을 나누는 대화와, 주목받으려 하지 않고 기꺼이 협력하는 겸손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적절하고도 온전히 복음적인 응답입니다. 

8. 이 세상은 권력과 부를 가진 자들을 칭송하고 추종하고 모방하는 한편, 가난한 이들을 소외시키고 쓸모없는 사람 취급을 하며 수치거리로 여깁니다. 바오로 사도는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1코린 12,26) 그래서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로마 12,15-16). 우리가 꾸준히 매진해야 하는 그리스도 제자의 이상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필리 2,5) 우리 마음이 더욱더 닮아 가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9. 지나치게 현재에만 매몰되어 있는 인생관이 우리의 무관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러한 무관심을 흔히 가난한 사람들이 뒤흔들어 놓고는 합니다.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은 해방되리라는 확신을 나타내는 희망의 부르짖음이기도 합니다. 이 희망은, 당신을 믿는 이들을 저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합니다(로마 8,31-39 참조). 

10. 형제 주교님과 사제 여러분 그리고 본당이나 연합회나 교회 운동들 안에서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에 대한 교회의 응답을 직접 실천하고 있는 수도자와 평신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이번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특별한 때로 지내기를 당부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가 날마다 복음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게 도우면서 우리를 복음화합니다. 이 날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 가난한 이들 앞에서 빚진 사람임을 기억합시다. 서로가 서로에게 손을 내밀 때에 구원의 만남이 실현되고, 이 구원의 만남이야말로 다시 오실 주님을 향한 여정에서 굳건한 믿음과 실천하는 사랑과 확신에 찬 희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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