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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 신부님 교중 미사의 짧은 강론 버전 입니다.

0815 성모승천대축일 Lk 1,39-56 믿음과 순종

 

코로나 상황에 미사를 직접 참석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하여, 부족하지만, 강론을 함께 나눕니다.

당일 강론과 약간 다를 수 있습니다. 상황에 맞춰 첨삭을 했고, 또한 추후 보완했습니다. 

 

오늘은, 성모승천 대축일, 예전에는 성모몽소승천 대축일이라 표현. 왜냐하면, 예수님의 승천과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승천은 자력 승천, (하느님의 아들이 되어 자기 힘으로 승천) 성모님의 승천은, 타력 승천, (하느님의 은총으로, 불리움받아 승천), 이렇게 구분된다. (나중에, 다른 기회에, 성모님의 승천과 관련된 전설을, 명화를 선보이며, 이야기 하겠다. 약속한다)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도 하느님 은총으로 승천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이 담겨있다.

 

개신교가 보기에는, 철없어 보일 것이다. 예수님만 강조해도, 할 얘기가 많은데, 마리아까지 섬기고, 마리아까지 챙기는 천주교가, 사이비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저는 달리 바라본다. 예수님의 신앙은, 성모님의 신앙 그대로 닮있다. 성모님이란 신앙의 땅 위에서, 예수님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것이다. 성모님 없이, 예수님만 얘기한다면, 땅을 벗어나, 사람 냄새를 없이, 하늘 얘기만 될 뿐이다.

 

 

..........

 

오늘은 성모님에 대해 강론하고자 한다. 그분의 순명, 순종에 대한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 하느님과 교회, 이 둘 사이에 관계는, 분명히, 주인과 종 간의 관계를 전제 조건으로 한다. “주님”이란 호칭에는, 이미 "저는 당신의 종입니다"라는 자백/고백이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성모님의 대답처럼, "말씀하신 그대로 순순히 따르겠나이다.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나이다. 온 마음을 다하고, 온 정성을 다하고 온 힘을 다해 그렇게 하겠나이다!"할 줄 알아야 한다. 순종/순명은, 이미 주종관계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신앙을 택하고, 신앙을 배우고, 신앙으로 살아간다는 건, 참으로 두려운 생활이 아닐 수 없다. 신앙생활을 하려면, 먼저 스스로 종이 될 각오를 하고, 종으로 살아야 한다. 믿으며 산다는 건, 이미 "저는 하느님의 종, 하느님의 노예입니다"라는 선언이며, 하느님께 종살이인 것이다. 만일 이 주종관계가 깔린 신앙이 아니면, 기필코,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먼저, 하느님을 나와 대등하게 보던가, 아니면, 하느님을 자기 종으로 부리던가...

 

오늘날 주종관계는 사라진지 오래이다. 그보다는, 민주주의가 대세이고, 더 매력적이다. 신앙도 민주적이면 좋을 것같다. “민주주의의 대원칙, 국민이 주인이다!” 하지만, 신앙과는 사뭇 다른 부분이 있다. 민주주의 세상에서는, 국민 각자가, 권리도 있고, 자유도 있고, 그래서 모두 다 평등해야 하고, 기회는 균등해야 하며, 과정은 공정해야 한다는 것, 맞는 말이다. 악독한 인간들이 많은, 인간들 사회에서 그렇다. 하지만, 신앙은 그것을 넘어선다.

 

만일 어떤 민주적인 신앙인은 하느님께 이렇게 요청할 것이다. “하느님은 저에게 자유를 허락해 줘시고, 내 시간과 내 사정/형편, 내 인권을 존중해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성당에 나가든, 안 나가든, 미사를 드리든, 안 드리든, 기도를 하든, 안 하든, 저를 괴롭히지 마세요, 저를 방해하지 마시고, 그냥 내버려 두세요!”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절대 민주적이면 안된디. 인간들 끼리는 민주적이어야 한다. 왜냐? 우리 인간은, 하느님이 주신 모든 것으로,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데, 마치 내 세상 만난양, 내가 하느님과 비등한 양, 요구할 수 있을까?

 

잘 생각해 보니,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주종관계를 발견했다. 이미 노예 해방이 된 지도, 오래되었는데 무슨? 아니다. 헌데, 잘 살펴보니, 괴상하게 변형된 주종관계이다. 바로 갑과 을의 관계! 온갖 안 좋은 것만 그러모아 생겨난, 현대판 주종 관계이다. 보통 갑은 사장/상사이고, 을은 부하/노동자이다. 가끔은 역전이 될 수도 있다. 갑은 고객/손님이고, 을은 사장이기도 하다. 예컨대 음식점과 같은 서비스 업종에서, 대개 그렇다.

 

갑은 을에게 요구할 수 있고, 을은 갑의 요구조건을 순순히, 그것도 즉각 들어주어야 한다. 을이 요구조건을 채우지 못할 때는, 갑은 을을 징계, 해고/파면할 수 있고, 피해보상을 청구할 수 있다. 을에게 이유란 없다. 갑이 무엇을 요구하든, 을은 을이니까 들어 주어야 한다. 돈의 많고 적음, 권력/힘의 크고 작음에 따라, 갑과 을은 더 명확해진다. 대개 돈이 많은 자, 큰 권력이을 가진 자가, 갑이다. 그 둘 다 없는 자는, 죽을때까지 을을 면치 못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갑을 관계는 더 확장된다. 비록 자기가 갑은 아니고, 을이면서도. 자기보다 못한, 힘없고 백없고 돈없는 병이나 정에게, 돌변하여 갑질하려 한다. 서로들, 갑질 못해, 분노 폭발하는 세상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언제는 갑, 언제는 을이 되기 마련이다. 헌데, 외계인, 별종, 괴물이 생겨났다. 수퍼 갑, 평생 갑, 절대 지존, 재벌 총수들이 그들이다. 참 부럽다. 마약해도 되고, 술먹고 운전해도 되고, 돈주고 사람 때려도 되고, 뇌물 먹고, 뇌물 줘도, 금방 무죄로 풀려난다. 헌법과 법조차, 자기 것으로 삼는 초법의 괴물이다.

 

여기서 잠깐, 갑을 관계는, 신앙에 해롭다. 하느님께도, 다른 형제 자매에게도, 엄청난 피해를 준다. 처음엔, 하느님이 갑, 우리는 을, 했다가, 돌연, 어느 순간, 자기가 갑이 되려 한다. 예컨대, 기도 오래 많이 길게 하고, 미사 많이 하고, 기부 많이 하고, 성당 봉사 많이 하면, 하느님 을은, 나에게 축복을 주어야 한다는 식이다. 대표적으로, ‘대입 수험생 기도’가 그렇다. 이전에는 절대, 전혀 안했던 기도를, 100일 동안 내가 기도해줬으니, 그에 합당하게, Sky에서 Sky를 내려 줘야 한다고 여긴다. 하느님께 갑질은 신앙이 아니다. 교우관계도...

 

(다시 돌아가) 여기서, 순종/순명이, 주종관계 신앙의 핵심이 된다. 종의 자세 중에 최고는, 순명이다. 순명이란 무엇일까? 신학생 때 들었던, 순명에 대한 묘한 질문이 떠오른다. ‘만일 장상이 불합리한 일을 시킬 때, 그걸 따라야 하는가? 순명해야 하는가?’ 물론 장상이 미치지 않는 이상, 완전 엉뚱한 일을 시키지 않을 것이다. 장상이 보기에, 그 일이 꼭 필요하기 때문에 시켰을 것이다. 비록 다른 사람들 시선에, 엉뚱해 보이더라도, 악 하나조차 허용하지 않으려고, 공동체 내에 형제애를 지키기 위한 조치일 것이다.

 

저분은 나에게 헛일을 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순종 안에는 그 믿음이 이미 깔려 있다. 장상을 믿기 때문에, / 장상이 시키는 일은 다 좋다고 믿기 때문에, 그 일로, 나와 우리 공동체에 유익이 될꺼라고 믿기 때문에, 기쁘게 그 일을 해내려는 것이, 순명이다. 장상에 대한 믿음 없이, 그냥 시키는 대로 일을 한다는 건, 순명이 아니다. 그건 기쁨없이, 억지로 일을 한다는 것이고, 또한 일만 그냥 해치우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순명은, 시키는 일을 했냐 안 했냐가 아니다. 그 일을 시킨 자를 믿었냐, 그리고 지금도 믿고 있느냐로 드러난다.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성모님의 모습이 독보적인 이유가, 바로 이 믿음에 있다. 예수라는 애를 나을래 말래, 그 예수의 엄마가 될래 말래, 가브리엘 천사의 말에, 마리아는 고민한다. 그러다, 성모님은 천사의 말을 믿고, 하느님의 뜻을 믿고, 따른다. 그건 하느님이 하시려는 일있고, 그분의 일은, 다 좋기 때문이다. 그분의 일은, 온 세상을 살리는, 구원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 가득한 마리아는, 순순히 하느님께 순종/순명한다.

 

나중에, 예수님도 그리 고민하셨을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힐래 말래, 십자가를 질래 말래, 제자들이 다 도망가고, 종교 지도자들이 모함해도, 십자가의 길을 걸을래 말래, 그 뻔히 보이는 죽음 앞에서, 예수님은 어떠셨을까? 예수님도, 성모님처럼,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원대한 뜻을 믿고, 그 죽음의 길을 기꺼이, 끝까지 걸어가신다. 당신 자신에게는 개죽음으로 끝나지만, 하느님 편에서는, 이 세상을 위해서는, 그게 구원임이 확실하니까, 그 힘들고 외로운 길을 끝까지 걸어가신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하느님을 믿는 그 믿음으로, 하느님이 세우려는 당신 나라가 어떠한 곳인지, 노래로 들려준다. 갑과 을로 나뉘지 않은 사회, 갑질 없고 을의 고통도, 병정의 고통도 없는 사회, 하느님만이 주인이 되어, 모두 다 하느님의 종들인 세상, 그래서, 서로를 형제 자매로 여기는 세상, 낙오자 없고, 이민자라고 무시당하지 않고, 고아와 과부여도 행복한 세상, 그런 하느님 나라를, 마리아는 꿈꾼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이 주인인 나라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하느님 것은 다 좋다는 믿음으로, 하느님 것을 기쁨으로 여기며 사는 사람이다. 미사도, 기도도, 봉사도, 사랑도, 용서도, 그 모든 하느님 바라는 것을, 자기 할 일로 삼고, 그 일을, 나의 구원, 세상 구원이라 여기며, 기쁘게 실행하는 사람이다. 종의 기쁨은, 주님을 믿는데서, 그리고, 하느님이 시킨 일을 해내고 있을 때, 생겨난다. 여러분도 성모님처럼, 기꺼이 하느님의 종이 되시렵니까?

 

죄송합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서툴러 실수가 많습니다.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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