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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 신부님 교중 미사의 짧은 강론 버전 입니다.

연중 제16주일 B Mk 6,30-34 귀찮음

 

코로나 상황에 미사를 직접 참석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하여, 부족하지만, 강론을 함께 나눕니다.

당일 강론과 약간 다를 수 있습니다. 상황에 맞춰 첨삭을 했고, 또한 추후 보완했습니다. 

 

오늘은 귀찮음에 대해 바라보고자 한다. 그 전에, 제 강론의 기본 전제, 그리고 제가 이곳에서 가장 먼저 강조한 믿음 하나, “하느님 것은 다 좋다. 하느님 것이 나를 구원으로 이끈다.” 이것부터 믿어야 한다. 여기서부터 믿음을 시작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두번째, 이제껏 나를 불편하게 만들어 왔던 것이 달리 보인다. 하느님 것을 다, 좋은 것으로, 구원의 것으로 확신하면, 미사도, 기도도, 고해성사도, 이제 더이상, 나에게 불편한 것이 아니다. 적극적으로 다가가, 내 기쁨으로 삼게 된다.

 

그것을 못 믿으니, 받는 사랑은 좋아하지만, 주는 사랑은 어려워하고 힘들어하고 귀찮아하게 된다.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고, 내 잘못과 실수 때문에 망가진 관계가 화해되고, 내가 용서받고, 다시 받아들이지는 건 환영하지만, 내가 용서하는 것은, 싫어한다. 미움이 해소되기를 바라지만, 내가 미움을 거두는 건, 참 쉽지 않다. 이 모순, 이 정신분열자의 미친 신앙을 느껴야 한다.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은 바라지만, 내가 사랑과 자비의 인간이 되려하지 않는다.

 

일 주일에 한 번, 이 주일미사 하나로, 충분히, 나의 지금 신앙상태를 점검할 수 있다. 이 미사, 불편한 자리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내가 왜, 이딴 천주교 믿어가지고...." 한탄부터 시작하지 않는가? 이 미사에 늘, 억지로, 마지 못해, 해야 하니까, 나오고 있지 않는가? 또한, 늘 게으름 피우다, 매번 미사에 늦고, 미사 드리고 나서도, 기쁨이 없기는 그대로 아닌가? (불편한 것을 잘 보라! 거기에 하느님이, 구원이 있다. 건강이, 참 기쁨이 있다)

 

기도, 불편하다. 고해성사도 불편하다. 성당 봉사도 불편하다, 이상하게도, 성당에서 하는 모든 일은, 불편하다. 세례받을 때도, 첫영성체 받을 때도, 견진 받을 때도, 혼인성사 받을 때도, 천주교는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왜 하느님은, 그 불편한 것을 우리에게 주셨을까? 왜, 불편을 은총이라고 주시고, 좀 더 편한 은총은 없는걸까?

 

성경 말씀 그대로,,나누고 섬기고 봉사하는 일, 용서하고 사랑하고 희생하는, 그 불편한 일을, 우리에게 하라고 하실까? 왜냐? 그 불편함 속에,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몸에 좋은 것, 또한 마음에도 좋은 것은, 실제로 불편한 것이 많다. 세상은, 그와 반대로, 불편 말고, 편함 속에, 행복이 있다고, 떠든다. 편안한 천국을 선전하고, 모두 다 바란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편함 속에, 욕심과 게으름이 있고, 이미 악이 숨어있다. 편함이 나를 망친다. 내 건강을 망치고, 내 인생을 망쳐 왔다.

 

(여기서 다음 단계) 귀찮음. 불편함에 대한 격한 반응이 귀찮음이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누구를 귀찮아 하는가? (저는 아침에 일찍 기상, 더 눕고 싶다. 영어공부, 운동, 운전할 때, Stop 싸인 지키는 것, 여러분도 스스로 찾아보길) ‘귀찮다’라는 우리말의 어원을 찾아보니, ‘귀하지 않다’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중요하지 않다’ 여기고, ‘하찮게’ 보니, 괴롭고 성가신, 귀찮음이 되는 것이다. (발견! 무언가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면, 그리고 하느님 것을 하찮게 여기면, 반드시, 이 귀찮음에 빠져, 냉담한다는 사실)

 

처음엔 "미사가 불편하다”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새, "미사가 귀찮다"로 바뀐 것이다. 불편해도 좋은 것이 있다는 믿음이 사라지니, 이젠, 싫증이 나는 것이다. 그것 말고, 더 편한 것, 더 좋은 것, 더 기쁜 것을 찾으려는 것이다. 귀찮음에는 이미, 분노가 깔려 있다. “왜 나를 못살게 굴까... 나 좀 내버려 둬” 짜증이 담겨 있다. 나아가, 귀찮음이, 미움을 만들고, 미움에 익숙하게 한다. 귀찮음이 발동되면, 하나하나 지옥이 된다

 

오늘 복음을 읽고, 생겨난 의문, “예수님은 어떻게 화도 안내고, 짜증도 내지 않을까? 어떻게 귀찮게 구는 사람을, 귀찮게 여기지 않을 수 있을까?”이다. 오늘 복음의 맥락에서 앞선 복음, 지난 주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셨다. 제자들에게, 참으로 불편한 주문으로 귀찮게 하신다. 난생 처음 복음을 전하라 하신다.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회개하라”고 외치라 하신다. 제자들은 그 불편한 일을 귀찮아했을까? 아니다.

 

이제 복음선포를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쉬라고 하신다. 일행을 데리고 배에 올라, 호수 건너편으로 가신다. 그런데, 군중들이 가만히 안둔다. 예수님과 그 일행의 이동을 보고, 그들을 뒤쫓아, 육로로, 열나게 달려간다. 그들은 불편함을 모른다.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배고파한다. 말씀이 빵이였고 생명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군중은 귀찮음으로 모른다. 오히려, 그분을 귀하게 여겨, 귀찮게 한다.

 

신기하게, 예수님도 군중을 귀찮게 여기지 않는다. 불편함 대신, 귀찮음 대신, 가엾음으로, 자비와 사랑으로, 그들을 응대하신다. 그들이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싶어한다는 사실에, 예수님은 피곤과 피로를 잊고, 그들을 환영하며 가르침을 주신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았기 때문이다. (목자 없는 양은 쉽게 길을 잃는다. 아울러, 목자를 하찮게, 귀찮게 여기는 양도, 반드시 길을 잃어 버린다.)

 

목자는 양을 돌보는 사람이다. 하지만, 목자의 돌봄은, 양들에게 편하지만은 않다. 양들을 편하게, 하고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면, 양을 죽인다. 양들을 흩어 놓을 뿐이다. 오늘 제1독서처럼, 양들이 길을 잃어도, 아프고 병 들어도, 양을 귀찮다고 여기는 목자는, 목자가 아니다. 양이 불편해도, 양들을 귀찮게 하며, 양들을 보살피고 살리는 목자가 참된 목자이다. (화답송 참조,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Ps 23,3]) 참 목자는, 그 일을 절대 귀찮게 여기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귀찮음을 없애고, 가엾은 마음, 자비와 사랑을 느끼는, 그 지점이, 참으로 신기하고 오묘하다. 스승은, 제자를 귀찮게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실상 그렇지 않다. 겉은 귀찮게 하지만, 속은, / 머리 속은 살찌운다. 스승은 제자를 귀찮아 하면 안된다. 제자들이 모르더라도, 실수하더라도, 길을 잃더라도, 그걸 귀찮아해서는 않된다. 스승은, 자신을 귀찮게 하는 제자를 좋아한다. 더 잘 알려 줄 수 있으니까... 스승은 귀찮음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제자도, 스승을 귀찮은 존재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스승이 자신들을 귀찮게 하는 이유를, 헤아려 잘 알고, 스승을 믿는 제자는, 자신도, 스승을 귀찮게 한다. 스승에게 늘 묻고, 숙제도 잘 하고, 스승의 인도대로 뒤쫓는다. 스승을 믿는다. 스승이 나에게, 좋은 것을 주리라 믿기 때문이다.

 

스승과 제자는, 서로 믿고, 서로 사랑하여, 서로 귀찮게 한다. 서로에 대해 절대 귀찮음을 갖지 않는다. 서로를 불편하게 하고, 서로 귀찮게 하지만, 실상 서로 돌보고 챙겨주고 보살펴서, 그런 것이다. 서로를 살리다 보니, 그런 것이다. 부모와 자식 관계도 그렇다. 그리고,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렇고, 사제와 신자 관계도 그렇다. 모든 사랑의 관계가 다 그렇다. 서로에게, 귀찮게 하나, 서로를, 귀찮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저도, 여러분을 불편하게 하고, 귀찮게 할 것이다. 신자들에게 편한 강론 대신에, 불편하게 하는 강론, 회개시키는 강론을 할 것이다. (물론, 제가 문장 솜씨, 말주변이 없어, 불편을 끼친다면, 사과합니다. 미리 용서를 빕니다. 참아주길) 다 아는 하느님, / 고리타분하고 뻔한 하느님, / 딱딱한 하느님 말고, 이제껏 몰랐던, 새롭고 낯선 하느님, / 지금도 우리에게 생명 되시고, 우리를 살리시는 하느님, / 말랑말랑 살아있는 하느님을 전하려 한다.

 

반대로, 여러분도 저를 귀찮게 하시길 빈다. ‘하느님을 알려 달라’, ‘어떤 믿음이 진짜 믿음이냐’, ‘어떻게 기도해야 하느냐’, ‘어떻게 죄고백해야 올바르냐’, 묻기를 빈다. 서로를 귀찮게 하지만, 귀찮음 하나 느끼지 않아야, 사제도 행복하고, 신자도 행복하다. 서로 마냥 불편한 존재, 귀찮은 존재로 보지 않기를 빈다. 제발... 그건 저나 여러분이나, 지옥의 시작이다.서로 귀찮음을 품지 않고, 서로 기쁘게 믿어주고, 서로 기꺼이 사랑하는 관계는, 둘다 성장한다. 둘 다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 일을 거뜬히 해낸다.

 

죄송합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서툴러 실수가 많습니다.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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