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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 신부님 교중 미사의 짧은 강론 버전 입니다.

연중 제23주일 B Mk 13,24-32 벽과 문

 

코로나 상황에 미사를 직접 참석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하여, 부족하지만, 강론을 함께 나눕니다.

당일 강론과 약간 다를 수 있습니다. 상황에 맞춰 첨삭을 했고, 또한 추후 보완했습니다. 

부족한 강론입니다. 저를 위해 기도 부탁드립니다.

 

오늘 복음 말씀 중에,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이 구절을 읽는 순간, 한 그림이 떠올랐다. 윌리엄 홀만 헌트 (William Holman Hunt, 1827- 1910)의 “세상의 빛” (The Light of the World)이란 그림이다. 영국 런던, 영국 성공회, 세인트 폴 대성당에 있는 제단화이다. (그림과, 자세한 그림 내용은, 구역장님께 카톡으로 보내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이, 등불을 손에 들고, 어둠 속에, 한 집을 찾아오셨다. 예수님이 문을 두드리신다. 그런데, 그 문 앞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아마도, 처음엔, 문으로 뚫어놨고, 그 문으로 드나들었을 것이다. 그 집에, 아마도 누군가 살고 있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젠 더이상, 문이 아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열어 본 적이 없는지, 담쟁이까지 문에 들러붙어, 처마까지 올라가 있다. 그리고 놀라운 건, 그 문엔, 손잡이가 없다. 사용한 적이 없는 것을 넘어, 아예 사용하지 않으려고, 이젠 그 누구도 드나들지 못하도록, 벽처럼 막아 버린, 겉 무늬만 문이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문이다.

 

원래는 문처럼 열렸으나, 이제는, 벽이나 담이 되어버린, 꽉 막힌 마음... 화가는 그 마음을 문으로 형상화했다. 화가는, 자신이 절감하는 바, 20세기초, 당시 영국 성공회 신앙인들의 굳게 닫혀버린 마음을 그렸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과 비교해보면, 하나도 변한 게 없다. 21세기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용된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과 벽을 치고, 사람과의 관계에도 벽을 만들고 산다. 서로 기뻐하며, 만남과 환영의 문이 될 수 있음에도, 움츠러 들다 못해, 아예 거리를 두려 한다.

 

여러분은 어떤가? 여러분과 하느님 사이에는, 벽이 없는가? 문을 내고 문을 열어두기보다는, 벽을 치고, 4개 벽 속에, 간섭받지 않고 사는 게, 더 편하다고 여기지 않는가? 천주교에서 알려주고 가르치고 의무 지운 모든 것들 때문인가? 기도는 어떠한가? 나와 하느님 사이의 문이라고 여기기는 하는가? 기쁘게, 그리고 감사하며, 기도하는가? 아니면, 여전히 버겁고 부담되고, 그래서, 이젠 제발 그만 좀 했으면, / 이제는 ‘나 좀 내버려 두었으면’ 벽을 치고 사는가? 나에게 신앙은 어느 십자가인가? 구원을 느끼고 구원을 소망케 하는 구원의 십자가인가? 그냥 짐짝처럼 무검게 짓누르는 십자가인가?

 

나아가, 여러분과 다른 신자들, 그 사이에 벽은 없는가? 문을 열어 놓기는 했지만, 들어오지 못하게, 문지방, 거기까지만 서 있기를 바라는, 철창이 쳐진 벽은 아닌가? 더 알려 하면, 안 되고, 너무 많이 알고 있어 거리두는, 서로 넘지 않는 벽, / 보이지 않는 벽, 그 속에 서로 갇혀 지내고 있지 않는가? 서로 상처받지도, 상처 주지도 않고자, / 서로 불편 주지도 불편 느끼지도 않고자, / 서로 간섭하지 않고, 마음 신경 쓰지 않고자, 벽이 오히려, 더 편하지 않는가?

 

언젠가, 어느 시인의 시구가, 저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모든 벽은 문이다." (천주교 시인으로, 유명한, 정호승 프란치스코 작가가, 그분이다) 시인은, 헤리포터 영화에서, 헤리포터가 벽을 통과해 가는 장면을 보고, 벽이 문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대다수의 사람은, 벽 앞에서 멈춰선다. 그 다음은 없다고 여기며, 자신하며, 거기서 발길을 돌린다. 지금 이대로도 살만하니까, 이 정도의 삶도 충분히 만족스러우니까, 선을 긋고 사는 것이다. 그 다음은 없다고 혹은, 그 다음은 모른다고, 혹은 관심 없다고, 등 돌리며 살려 한다.

 

시인이 직접 기고했던 글을 인용하자면... "벽을 벽으로만 보면, 문은 보이지 않는다. 가능한 일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 결국 벽이 보이고,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다고 보면, 결국 문이 보인다. 벽 속에 있는 문을 보는 눈만 있으면, 누구의 벽이든, 문이 될 수 있다. 그 문이 굳이 클 필요는 없다. 좁은 문이라도, 열고 나가기만 하면, 화합과 희망의 세상은 넓다. 그러나, 마음속에 작은 문을 하나 지니고 있어도, 그 문을 굳게 닫고, 벽으로 사용하면, 이미 문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어디를 둘러보아도, 사방이 벽이다. 이념 간에, 세대 간에, 계층 간의 벽이 견고하다. 어떤 때는, 높디높은 성벽에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느껴져, 숨이 막힌다. 그러나, 그 어떤 성벽이라도, 문은 있다. 문 없는 벽은 없다. 모든 벽은 문이다. 벽은 문을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벽 없이, 문은 존재할 수 없다."

 

벽은 절망이 되고, 문은 희망이 된다. 여러분과 하느님 사이에, 그리고 여러분 자신과 이웃 교우 사이에, 벽이 있는가? 있다면, 벽이 많은가, 문이 많은가? 하느님께도, 이웃에게도, 일부러 벽을 둘러치고, 혹은 당연하다는 듯, 벽을 쌓고 사는 사람이, 참 많다. 예컨대, 하느님 말씀에 대하여, 나 자신은 생활하는 가운데, 생각/말/행위 속에, 하느님 말씀을 초대하며, 환영하며, 하느님 말씀 모시기를 좋아하는가? 아니면, 하느님 말씀을, 모르는 척하거나, 매몰차게 거부하거나, 말씀을 거추장 스럽다, 말씀이 어리석다, 비난/조롱할 때가 많은가?

 

나는 이웃에게 쉽게 다가가는가? 이웃이 나에게 다가올 때서야, 다가와 주어야, 그 때서야, 아는 척 하는가? 반대로, 이웃들은 나에게 쉽게 다가오려 하는가? 내 눈치 살피고, 긴장하고, 다가서기를 엄두도 못내는 걸, 내심 느끼는가? 우리, 과거 세대는, 어릴 때부터, 벽을 만드는 기술을, 주로 배운 것 같다. 문을 내고, 문을 여는 기술 대신에... 소통하고 화해하는 기술 대신에, 상명하복, 일사분란, 경쟁/성적, 순위-계급, 그런 틀에 더 익숙해진 것 같다.

 

저 자신의 고질병이기도 하다. 여러분은 어떤가? 젊은 사람들, 혹은 청소년,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게, 힘겹고 두렵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짐짓, 체면, 체통 차리려 하고, 권위를 인정받고 싶어 하지 않는가? 오늘날 수구 꼴통, 꼰대 벽창호가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나 보다. 누가 이 문을 열어 줄 것인가? 누가 나를, 이 문에서 더 큰 세상에로 이끌어 줄 것인가? 그건 나의 일 아닌가?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 나는, "나는 그냥 이대로 살래" 말하지 말기를, / 벽을 치는 걸, 안정이나 평화, 그게 어른의 자세라 여기지 말기를, / 벽을 둘러치기보다, 문을 찾고, 문을 소망하며, 문 만들기를 멈추지 말기를...

 

오늘 복음에서,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오늘, 그리고 지금, 우리 모두는, 나에게 찾아오시는 예수님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마주함에, 우리 각자는, 벽을 칠지, 문을 열지, 선택/결정해야 한다. 누구에게 떠맡길 수 없는, 각자의 일, 각자의 몫이다. 뭔가 거창한 신앙/신심, 더 경건한 무언가가 필요하지도 않다. 그저 예수님 맞이하듯이, 살면 된다. 어떤 일을, 어떤 사람을, 예수님께 대하듯이, 대하면 된다. 내 몸을, 내 말을, 내 시간을, 하느님 것 다루듯이, 다루면 충분하다.

 

내것보다, 하느님 것이 많은 자가, 그렇게 산다. 내것이 많은 자는, 절대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내 욕심의 것, 그 내것이, 하느님 사이에, 사람 사이에, 두꺼운 벽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내리깔리는, 종말의 때는, 지금과는 아주 다르거나, 나중에 오게 될 어떤 색 다른 때를 말하는 게 아니다. 지금 여기를 말한다. 지금 여기를, 천국 문으로 대하는 사람, / 지금 여기를, 하느님 나라의 문지방으로 여기는 사람, 그들을 위한 날이다. 지금 여기, 하느님과 함께 살듯, 그때도, 하느님을 마주 보고 살 것이다.

 
참조:

정호승 시인 , <모든 벽은 문이다>, 동아일보 2011.11.03

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111103/41597251/1

 
죄송합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서툴러 실수가 많습니다.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를 빕니다.
 
light_of_the_world_holmanhunt.jpg

 

BkNfZ_mCEAAVEvT.jpg

 

그림 설명 참조: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 이종환 요한 신부님 작성

http://www.ofmkorea.org/index.php?mid=ofmsacredpicture&listStyle=viewer&document_srl=6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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