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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 신부님 교중 미사의 짧은 강론 버전 입니다.

연중 제32주일 B Mk 12,38-44 가난

 

코로나 상황에 미사를 직접 참석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하여, 부족하지만, 강론을 함께 나눕니다.

당일 강론과 약간 다를 수 있습니다. 상황에 맞춰 첨삭을 했고, 또한 추후 보완했습니다. 

부족한 강론입니다. 저를 위해 기도 부탁드립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Mt 5,3) 오늘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구절이다. 이 말씀은, 진복팔단의 첫번째가 선포된다. 마태오 복음서는, 루카 복음서와는 달리, 가난을 영성화했다. 그래서, 그냥 가난한 자가 아니라, 마음까지 가난한 자를 강조하고 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모든 인간은 행복을 바란다. 행복을 추구한다. 나아가, 욕심 많은 자는, 늘 뭐든 욕심내듯이, 부유한 자, 부와 권력까지 쥔 자들도, 천국까지 탐낸다. 헌데, 복음구절은, 그와 반대다. 하느님 나라는, 되려 부가 없는 자, 재물/권력 없어도 살만한 자, 그것 없이도 충분히, 행복한 자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은, 실로 충격적이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가기 위해, / 그분 은총과 보호, 그분 구원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줄 안다. 내게 익숙한 세상 논리로, 뭔가 특별한 게 있어야, 궁극 행복을 얻을 것 같다. 뭔가 더 심오하고 거룩한 짓을 해야 할 것 같다. 뭔가 어렵고 힘든 짓, 나도 남들도 모두, 감탄해 마지않는, 고급 신앙 기술을 을 걸어야, 하느님이 들어 주실 것 같다. 욕심에 눈멀어, 하느님도 욕심보인 줄 안다. 경건히 속이면, 그것도 이쁘게 봐줄 줄 안다. 신앙 없이, 하느님을 섬기니, 결국 자기 파멸에 빠지는 꼴이다. 하느님을 오해, 곡해, 착각하는 바보다.

 

여기서, 마음의 가난, 영적인 가난? 그것은 무엇일까? 요즈음, 저는, 교회 역사 책을 탐독 중이다. 교회사 속에, 걸출한 인물들이 많다. 그 중, 신학적으로, 바오로 사도,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노,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 이 셋은 우리 신앙의 핵심을 짚어준 분들이다. 믿음과 은총. (원래 루터는,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수사 신부이고, 바오로 서간에 심취한 성경 교수였다. 바오로와 아우구스티노에게 영향을 엄청 받았다.) 영성적으로는,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들 수 있다.

 

마음의 가난, 영적인 가난은, 마음속에, 하느님만으로 가득한 가난, (이 세상 것 다른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고, 하느님 은총 충만히 느끼고 감사하며 사는 가난이다. (그 모든 걸 하느님 은총으로 보는 신앙을 말한다.) 셋 다, 하느님 은총에서 출발했고, 하느님 믿음으로 충만했던 분들이다. 크신 은총을 알기에, 그 크신 은총 때문에,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금도 나에게 베푸시는 하느님 은총을, 늘 감지할 수 있는 자는, 하느님 안에서, 은총 속에서, 기뻐 뛰놀며 산다. 다른 것이 필요 없다. 더 있어야 할 것도 없다. 오직 하느님이 주신 것만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최고이고, 지선이기 때문이다.

 

(지난 주 강론을 연상) 나의 살아있음부터, 내 심장/생명부터 하느님 은총을 깨닫고, 그 은총에 감사하며 사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세상에 심장이 되어, 세상 살리는 생명이 되어 살아 가려 한다. 그 은총 닮아, 물론 한 참 부족해만, 늘 축복 뿌리며 살아간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은총 속에서, 은총 느끼며 사는 사람과, 은총을 알기만 하고, 혹은 은총을 아예 모르면서, 자기 살기 바쁜 사람, 그래서, 늘 자기 맘대로, 자기 식대로, 자기 욕심껏 살아가는 사람, 이 두 부류로 나뉜다.

 

하느님 은총 없이, 하느님 은총을 모르고, 물질로만 살아왔고, 그리 살기만 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이 가난을 모른다. 그저 세상 가난처럼 싫어하고 미워하지만 한다. 물질을 앞에 두고 가난을 보니, 은총 앞에 가난, 그러나 은총 충만한 부유를 모른다. 하거나 지금이나, 인간은, 물질과 재물이, 가난과 부유를 나누는 기준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다. 물질을 등한시하면, 진짜 가난해질 것이라, 늘 불안해한다. 그래서 은총 심장 대신에, 하느님 없이, 욕심 심장을 달고 살아간다. 그런데, 어쩔까? 욕심은 늘, 나를 신처럼, 아니 신을 능가하게 만든다. 내 욕심은, 늘 무한을 지향하고, 그 때문에, 불만족도 무한에로 치닫고 만다.

 

하느님을 빼버린, 물질과 재물 때문에, 영원한 악순환이 생겨났다. 무한 욕심에, 무한 불만족, 계속 순환하는, 무한 불안, 무한 우울, 그게 불행이다. 하느님 없으면, 하느님 은총을 깨닫지 못하면, 죽을 때까지, 뼈빠지게 번 돈으로, 늘 먹고 마시는 거 탐내고 곧 불만 갖고, 여기저기, 여행가고 해외 순례하며, 노숙하다가, 돈 생기면, 늘 명품, 홈쇼핑 물건, 이것저것, 구매/소비하며, 남 좋은 일 시키다가, 요양원에서 죽는 인생이다. 행복하고자 소비하는 인생이다. 온갖 편한 거 찾다, 건강까지 탐내는 인생이다. 알약 하나로, 건강을 얻으려 한다.

 

이제 가난이 구분되기 시작한다. 물질 가난과 영적 가난의 차이가 드러난다. 물질이 적거나 없으면, 가난한 자 맞다. 물질이 많으면, 살림도 부유지만, 마음도 욕심으로 부유한 자, 아니 비만자가 되기 쉽다. (말이 부유지, 쓰레기장이다.) 한 손에 무언가 쥐고 있으면, 다른 한 손에 또 다른 무언가를 쥐고 싶기 때문이다. 두 손 다 무언가 쥐어도, 문제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곧바로 불만족에 휩싸인다. 은행 계좌에, 0이 하나더 생기기를, 생기면, 0이 또 하나 생기기를 바라듯이, 무한대 욕심이다.

 

물질이 적절히 있어야 할 것 같다. 근데 물질은 늘 부족하다. 늘 부족함을 느끼게 마련이다. 물론 물질이 부족해도, 마음이 넉넉한 사람도 있다. 조금 불편을 느껴도, 이내 털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근데 그러기가 쉽지 않다. 물질의 부족이, 마음속 여유 부족이 되기 쉽다. 부족을 못 견딘다. 뭔가 채워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물질에 집착한다. 없는 것에 마음을 늘 빼앗긴다. 부족해서, 없어서, 항상 울상이다.

 

물질의 가난이, 마음속 평온의 가난, 불안 가득한 마음이 돼버린다. 물질이 부족한 건데, 마음엔 불평 불만이 가득해지고, 집착이나 탐욕이 넘쳐난다. 마음속에, 쓸데없는 잡념으로 부유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 오늘날 참으로 많다. 그들은 적당, 적절을 모른다. 하나가 채워지면, 다시 reset. 또 다른 무언가, 채워야 할 것을 내내 탐색해 본다. 부족한 걸 많이 채우면 될까? 이니, 쓸데없이 남아도는 것 때문에 골치 아파진다. 결국 창고엔, 수납 공간엔, 다락방엔, 안 쓰는 것들로 넘쳐 난다.

 

물질이 없다고, 물질을 버린다고, 물질을 눈에서 치워 없앤다고, 다 영적인 가난이 생기는 건 아니다. 물질을 어떻게 보느냐, 무엇으로 보느냐가 관건이다. 물질을 내것으로 보거나, 내 것이 되기를 탐내거나, 지금 내 손에 없는 것, 내것 있었으면 하는 것에 속상해한다면, 그건 진짜 찢어지게 가난한 자, 거지다. 세상살이도 거지, 신앙살이도 거지다.

 

세상 것이 많아도, 세상 것이 부족해도, 세상 것이 없어도, 자기 마음에 세상 것에 대한 생각과 관심, 탐욕과 불만으로 가득한, 그 사람은, 정말 불행하다. 결국, 이 세상 것들을 은총으로 알아보느냐, 은총으로 여기고, 그 은총으로 소중히 다루며 사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는 하느님이 거저 주신 은총만으로, 오늘 하루를, 나아가 평생을 기쁨으로 채울 수 있다. 그 은총에, 절로 가슴 벅찬, 기쁨 충만한 감사를 드릴 수 있다.

 

여러분은, 하느님 것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하느님 은총을 한 아름 느끼며 사는 사람인가? 하느님으로 부유한, 하느님만으로 충분한 가난한 자인가? 우리가 왜 기쁨 없으며, 행복하지 않은지, 이제야 느껴지지 않는가?

 
죄송합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서툴러 실수가 많습니다.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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