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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 신부님 교중 미사의 짧은 강론 버전 입니다.

연중 제31주일 B Mk 12,28-34, 4가지로 사랑

 

코로나 상황에 미사를 직접 참석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하여, 부족하지만, 강론을 함께 나눕니다.

당일 강론과 약간 다를 수 있습니다. 상황에 맞춰 첨삭을 했고, 또한 추후 보완했습니다. 

부족한 강론입니다. 저를 위해 기도 부탁드립니다.

 

오늘 독서-복음 말씀에는, 사랑이 넘쳐난다. 제 강론에도, 그 사랑을 담아내려 애썼다. 헌데, 언제나 그렇듯, 하느님이 저에게 알려주시는 게 너무나 많은데, 제 머리, 제 표현력이 항상 부족하여, 압축/요약을 못했다. 하느님께, / 여러분께, 항상 죄송스럽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 하나! 우리 인간은, 하느님을 사랑하듯이, 인간을 사랑하게 마련이다. 하느님께 대하는 자세와, 사람에게 대하는 자세가, 서로 통한다. 하느님을 대충 사랑하면, 사람도 대충 사랑하게 된다. 하느님께 욕심으로 기도하면, 사람에게 욕심부리기만 한다.

 

그리고 두 번째! 하느님 사랑에 감사하는, 그 총량이 바로, 내가 사람에게, 이웃에게, 이 세상에 나누는 사랑/봉사의 양과 엇비슷하다. 물론, 이건 다른 사람이 볼 때, 그렇다는 말이다. 본인 스스로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에, 늘 감사 + 늘 죄송한 마음뿐이다. 그분이 나에게, 지금까지, / 지금도 주신 사랑에 비하면, 나는 사랑한 적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랑 늘 부족하고, 내 사랑은 새발의 피, 아니, 아예 무(無)라고 여긴다.

 

오늘 독서, 신명기의 말씀,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1) 마음을 다하고, 2) 목숨을 다하고, 3)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Dtn 6,4) 모세는, 하느님을 삼중으로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마음, 목숨, 힘을 다해... (먼저 설명해야 할 것이 있다. 구약과 신약, 히브리어와 희랍어, 이 둘 간에, 분명 차이가 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여기 세 단어만큼은, 별반 차이 없다.)

 

첫째로, “마음.” 하느님을 사랑하는 도구/방법 중에, 가장 먼저이다. 영어로, heart, 심장이다. 고대인들이 보기에, 인간은, 심장이 없으면, 죽은 시체다. 그리고 사람의 감정과 기분, 건강은, 심장과 밀접하다. 심장은, 단순히, 피를 순환시키는, 물질, 기계를 넘어선다. 내 심장은, 어느 날 처음 박동될 때부터, 언젠가 멈출 그 날까지,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움직이고 멈출 것이다. 하느님이 첫 스파크 불꽃을, 내 안에 붙여주셨고, 이후 하느님이 배려와 손길로 살다가, 결국 그분이 거두어 가시는, 그분 것, 생명이다.

 

내 몸속에 있지만, 심장은, 내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것이 또 하나있다. 두 번째, 내 "목숨"이다. 말 그대로, 숨이다. 창세기에서는 영이라고 번역되는 용어다. (영어로는, soul) 고대인들이 보기에, 심장만큼이나, 숨도 꼭 필요하다. 숨이 있어야, 진짜 살아있을 수 있다. 예컨대, 사람이 물속에 있을 때, 심장은 뛴다. 하지만, 숨을 쉴 수 없기 때문에, 죽는다. 헌데, 숨은 좀 복잡하다. 내가 의식해서든, 무의식 상태에서든, 숨을 쉴 수 있다. 잠잘 때, 죽지 않는 이치이다. 겉보기에, 내가, 내 허파가, 숨을 쉬는 것 같지만, 내 몸이 알아서, 나를 위해, 숨 쉬어 준다.

 

하지만, 숨 쉴 자리를, 잘 가려야 한다. 이산화탄소, 일산화탄소, 연탄가스, 잘못 마시면, 죽어 버린다. 우리는, 심장 덕분에, 숨을 쉬고, 그 숨 덕분에 심장이 뛰고, 그 둘 덕분에, 우리는 산다. 살아있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없다. 그저 잘 먹어주고, 운동하여, 건강을 유지하고 등등... 그것도 다, 심장 덕분이고, 숨 덕분이다. 모두 다, 하느님 덕분이다. 숨 붙어 있는 건 모두다, 하느님의 숨결과 손길로, 생명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 "힘을 다하여", 이건 조금 다르다. 나의 힘인 것이다. 거기엔, 내 의지와 내 원의, 욕망이 담겨 있다. 내가 좋아하고, 내가 원하고, 내가 하고 싶어하는 것을 하려는 힘이다. 헌데, 꼼꼼히 따져보면, 그 힘도, 막상 내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것, 하느님것 아닐까? 하느님이 나에게 선물로 주신, 인프라, 심장과 숨에서 나온 것 아닌가? 우리는 무엇에 힘쓰며 사는가? 심장과 숨결로, 하느님이 주신 생명 에너지를, 나는 어디다 쓰며 살아 왔던가? 그 생명을 지금, 어떻게 사용하며, 살고 있는가?

 

하느님이 우리에게 사랑으로 주신 심장과 숨은, 하느님처럼, / 하느님 당신이 하시는 것처럼, 거저 사랑해 주라고, 사랑할 힘으로 사용하라고, 주신 것들이다.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누군가에게, (나 자신도 포함하여) / 하느님이 하시고픈 사랑의 일에, (내가 하고는 일 이전에) 그 생명과 숨으로 힘을 내어, 사랑으로 바꾸고, 사랑으로 채우라고 주신 것이다. 내 손과 말, 뼈와 근육, 눈코귀입, 그 모든 걸 힘껏 동원하여, 하느님 주신 생명을 나르는 통로, /하느님 사랑을 전하는 물길이 되라는 뜻이다.

 

하느님 것 생명을, 하느님 일에 힘쓰라는 뜻이다.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처럼, 나도 사랑하려는 데, 힘을 다하고 있는가? 그게 마땅하고 옳다. 헌데, 우리는 애써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애쓴다. 나를 살리는 심장과 숨으로, 나도 하느님처럼, 살리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게 하느님이 나에게 심장과 숨을 주신 이유, / 지금, 나를 살리고 있는 이유이다. 내가 태어난 이유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힘을 내어, 사랑 전달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이제, 신앙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분명해진다. 거저 생명 받은 자, 거저 생명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여러분의 말은, 과연 누군가를 살리는 말인가? 생명을 담은 말, 거짓 빼고, 진심 담은 말인가? 그저 뒷담화, 험담, 악담, 남의 잘못/실수, 남의 죄를 고발하고, 씹고 뜯고 즐기는 말은 아닌가? 그저 미움으로, 분노로, 질투로, 욕망으로, 욕심으로, 온갖 감정으로, 상대를 죽이는 말, 혹은 상대도 모르게 뒷통수 치려는 말은 아닌가? 이와 더불어, 나의 행동도, 누군가를 살리는, 살려내려는 몸짓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거기에 또 하나의 사랑조건을 다신다. "정신을 다하여" 구약 신명기에도 없는 이 구절이, 참 수상하다. 희랍어로는, διάνοια, διά ~을 통하여, 관통하여, 꿰뚫어 + νοῦς 이 단어는 인간의 모든 정신활동을 뜻한다. 이성-지성, 사고, 기억, 감정, 의지 등, 그 모든 작용을 뜻한다. 해석하자면, "인간의 정신 활동을 다 동원하여, 나아가, 의존에 갖고 있던 생각. 기억, 감정, 의지를 꿰뚫어 관통하여."

 

우리는 생각 없이 사랑한다. 정신 없이, 사랑한다. 정신 차려 사랑하기 보다는, 늘 감정에 치우쳐, 이끌려 사랑한다. 무엇이 좋은 사랑인지, 나쁜 사랑인지, 구분/식별하지 못하고, 무작정 사랑하려고 한다. 혹은 그냥 대충 사랑하려 한다. 내가 편한 식으로 사랑하려 한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정도만, 사랑하려 한다. 더 좋은 사랑을 찾는 데는, 늘 굼뜨다. 많은 경우, 무언가 얻으려고, 이득 보려고 사랑하려고 한다. 그래서, 싫지만, 억지로 사랑/봉사할 때가 많다. 그저 생색내기 사랑, 빈말 사랑, 말뿐인 사랑으로, 거드름 피우며, 사랑인 체한다.

 

더 큰 문제는, 옛날 기억, 다투고 싸웠던 안 좋은 추억, 분노와 원한, 괘씸함과 복수심에 사무쳐, 사랑을 거둔다. 내가 받은 설움과 모욕,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복수, 안갚음 안 한 것만으로 감사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내 욕심도, 사랑의 장애물이다. 내 이득은 없고, 생고생만 할 것같아, 사랑과 봉사를 피한다. 이런저런, 속보이는 변명을 늘어 놓으며, 잘 모른다고, 잘 못 한다고, 민폐만 될꺼라고, 이리저리 뺀다. (물론, 시간이 없어서, 봉사를 못할 것이다. 헌데, 사랑이 부족해서, 낼 시간이 없는 것 아닌가? 사목위원, 구역장 선출 때, 다들 그런다.)

 

또한 내 게으름도, 사랑의 장애물이 된다. 편한 봉사만, 쉬운 봉사만 하고 싶고, / 누가 시켜야 겨우 봉사하고, 그것도 짜증내며 하고, / 자기 스스로는 사랑과 봉사, 하나도 생각해내지도 못하면서, 남이 나에게 시킨다고, 욕하거나, 남들 사랑/봉사에 참견하고, 비난하고, 못 한다고, 못하게 훼방놓고, / 해왔던 봉사도, 나 대신, 늘 남이 대신해 주기를 바라고, 혹은 ‘남이 하겠지’, 그냥 제껴 버리고, / 남들 하니까, 같이 덩달아 하고, 남들 안 하니, 나도 언른 손 놓고, / 나는 안 할 수 있지만, 너는 안 하면 안 되고, (못된 부모가 이렇다) / 내가 안 한 봉사, 남이 하면, 그거 할 필요 없다고, 혹은 왜 남의 일 참견하냐고, 성내고, / 내 허락받고, 봉사하라고, 으름장 놓는다. (완장 찬 사람, 간부들이 이런 말, 잘 한다) 내 사랑 없음에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자기 모욕감에, 내 사랑 없음을 들췄다고, 이를 간다.

 

그래서, 예수님은, 정신 차리고, 회개하듯이 사랑하라 하신다. 이제껏, 성경이 시키니까, 억지로, 마지못해, 찡그리며, 사랑해 왔다. 이제는 끝이다. 온 기쁨, 온 진심, 하나 거짓 없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내가 놓치는 사랑은 없는지, 선을 찾듯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혹시나 내 사랑이, 남에게 해가 되는지, 성찰/반성하며, 사랑하라는 것이다. 옛날 상처, 미움, 다툼 때문, 사랑 거두지 말고, 그 벽을 뚫어 사랑하라 하신다. 내 편의, 내 욕심도 뚫어버리고, 내 게으름도 돌파하여, 늘 사랑할 일을 찾으라고 하신다.

 

오늘의 하일라이트는, 율법학자이다. 그는, 예수님이 신명기 말씀에 하나를 추가한 4가지를, 다시 3가지로 바꾼다. 이상하다. 마음/심장은 그대론데, 목숨/숨은 삭제한다. 하느님 것 중에 하나만 취하고, 다른 하나는 자기 것인양 여긴다. 숨은 내것이다. 내 맘대로, 숨을 사용하겠다는 뜻이다. 하느님이 주신 숨결로, 자신을 살리는 숨으로, 누군가에게 숨을 불어 넣어 주는 일을 그만두겠다는 뜻이다.

 

그리고는 "정신을 다하여" 대신에, "생각을 다하여"로 고친다. 희랍어로, σύνεσις, σύν 함께, 더불어 + ἵημι (to send) 보내다, 전달하다. 해석하자면, "함께 곁들여 보낼 것 모두로" (저 나름 비유하자면) 선물에 첨부하는 손편지, 축하/감사 카드, 그 정도로, 그만큼만? 저는, “의도, 속내”라고 번역하고 싶다. 내 모든 속내를 담아,.. 율법학자는, 예수님의 사랑을, 자기 식대로, 재단하여, 자기 맘대로, 사랑하려 한다. 심장은 있으되, 영혼 없는 사랑을 하려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학자를 칭찬한다. 왜? 다른 종교지도자들이, 당신에 대해 미움과 질투로, / 다들 죽일 음모를 꾸밀 때, 이 율법학자만큼은, 예수님 말씀의 옳음을, 옳음으로 인정한다. 스스로, 예수님에 대한 악감정을 꿰뚫어, 회개하여, 말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그렇게 가깝지도 않다는 말도 된다. 그럼에도, 하느님 나라에 한 발 다가선 것이다.

 

예수님을 통하여, 그분 말씀을 통하여, 이 세상은, 난리났다. 그분 말씀의 옳음을 받아들여, 회개할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미워하고, ‘나에게 수치심, 모욕감을 줬다’고 죽이려 달겨 들 것인가? 우리, 이 사랑 잘 못하는 바보들도, 암만 가르쳐 줘도, 늘 자기식 대로 사랑하려고 한다. 심장과 숨, 그 생명을, 하느님의 그 큰 사랑으로 받았으면서도, 나는, 우리는, 늘상, 사랑에 인색하다. 늘 사랑받고자 욕심만 부리고, 늘 사랑에 무기력하다.

 

여러분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여러분이 하느님께, 이웃에게 나누는 사랑, 그 둘 중 어느 쪽에 더 큰가? 하느님께 늘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늘 내 사랑없음에 회개하며, 기쁘게 사랑에 힘쓰며 살기를 빈다.

 

 

죄송합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서툴러 실수가 많습니다.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를 빕니다.

 

 

 

마르코복음 12:28–34 (SBLGNT): 28 Καὶ προσελθὼν εἷς τῶν γραμματέων ἀκούσας αὐτῶν συζητούντων, ἰδὼν ὅτι καλῶς ἀπεκρίθη αὐτοῖς, ἐπηρώτησεν αὐτόν· Ποία ἐστὶν ἐντολὴ πρώτη πάντων; 29 ἀπεκρίθη ὁ Ἰησοῦς ὅτι Πρώτη ἐστίν· Ἄκουε, Ἰσραήλ, κύριος ὁ θεὸς ἡμῶν κύριος εἷς ἐστιν, 30 καὶ ἀγαπήσεις κύριον τὸν θεόν σου ἐξ ὅλης τῆς καρδίας σου καὶ ἐξ ὅλης τῆς ψυχῆς σου καὶ ἐξ ὅλης τῆς διανοίας σου καὶ ἐξ ὅλης τῆς ἰσχύος σου. 31 δευτέρα αὕτη· Ἀγαπήσεις τὸν πλησίον σου ὡς σεαυτόν. μείζων τούτων ἄλλη ἐντολὴ οὐκ ἔστιν. 32 καὶ εἶπεν αὐτῷ ὁ γραμματεύς· Καλῶς, διδάσκαλε, ἐπʼ ἀληθείας εἶπες ὅτι εἷς ἐστιν καὶ οὐκ ἔστιν ἄλλος πλὴν αὐτοῦ· 33 καὶ τὸ ἀγαπᾶν αὐτὸν ἐξ ὅλης τῆς καρδίας καὶ ἐξ ὅλης τῆς συνέσεως καὶ ἐξ ὅλης τῆς ἰσχύος καὶ τὸ ἀγαπᾶν τὸν πλησίον ὡς ἑαυτὸν περισσότερόν ἐστιν πάντων τῶν ὁλοκαυτωμάτων καὶ θυσιῶν. 34 καὶ ὁ Ἰησοῦς ἰδὼν αὐτὸν ὅτι νουνεχῶς ἀπεκρίθη εἶπεν αὐτῷ· Οὐ μακρὰν εἶ ἀπὸ τῆς βασιλείας τοῦ θεοῦ. καὶ οὐδεὶς οὐκέτι ἐτόλμα αὐτὸν ἐπερωτῆσαι.

 

1271. διάνοια dianŏia, dee-an´-oy-ah; from 1223 and 3563; deep thought, prop. the faculty (mind or its disposition), by impl. its exercise:—imagination, mind, understanding.

 

3563. νοῦς nŏus, nooce; prob. from the base of 1097; the intellect, i.e. mind (divine or human; in thought, feeling, or will); by impl. meaning:—mind, understanding. Comp. 5590.

 

 

4907. σύνεσις sunĕsis, soon´-es-is; from 4920; a mental putting together, i.e. intelligence or (concr.) the intellect:—knowledge, understanding.

 

4920. συνίημι suniēmi, soon-ee´-ay-mee; from 4862 and ἵημι hiēmi (to send); to put together, i.e. (mentally) to comprehend; by impl. to act piously:—consider, understand, be wise.

 

4862. σύν sun, soon; a prim. prep. denoting union; with or together (but much closer than 3326 or 3844), i.e. by association, companionship, process, resemblance, possession, instrumentality, addition, etc.:—beside, with. In comp. it has similar applications, includ. complete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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