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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 신부님 교중 미사의 짧은 강론 버전 입니다.

연중 제29주일 B Lk 10,35-45 섬김

 

코로나 상황에 미사를 직접 참석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하여, 부족하지만, 강론을 함께 나눕니다.

당일 강론과 약간 다를 수 있습니다. 상황에 맞춰 첨삭을 했고, 또한 추후 보완했습니다. 

부족한 강론입니다. 저를 위해 기도 부탁드립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저는 이 노래 좋아하지 않는다. 이 가사가, "당신은 사랑 주기 위해 태어난 사람"여야 맞다. 이 노래 때문에, 개나 소나, 다들, 사랑 달라고 난리친다. 사랑 얻으려 욕심부린다. (아닌 것 같다구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섬김"이라는 단어를 집어 넣어보면, 알게 된다. "당신은 섬김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단언컨대, 우리는 섬김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누군가를, 섬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섬김이 사랑이다. 섬김이 있어야, 진짜 사랑이 된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이 섬김을 몰랐기 때문에, / 알았어도, 쉽게 잊었기 때문에, 섬김 대신, 선민에 취해 살았다. 선택된 민족, 자기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무한한 은총과 축복, 특권과 특혜를 받은 민족인양 의시댔고, 오만에 빠졌다. 원래 사랑이란 좋은 것을, 유다인이, 아니 더 크게, 모든 종교인들이 변질시겼다. 나만 사랑/축복/은총받고, 나만 잘 되기를 바라는 종교심은, 그래서 악마의 마음이다. 하느님까지 버리고, 결국 하느님도 죽이는 마음으로 변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미 증명되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사랑이란 말 대신에, 섬김이란 말을 더 사랑해야 한다. 사랑을 얘기할 때, 반드시 섬김을 같이 생각해야 한다. 섬김 없는 사랑은, 이상하게도, 틀린 사랑, 잘못된 사랑, 욕심 사랑이 될 수 있다. 섬김이 들어가야, 신앙도 제대로가 된다. 기도도, 미사도, 고해성사도, 봉사도, 다 섬김 생활이다. 섬김 없는 신앙생활은, 위험하다. 가식, 위선이 되기 쉽고, 죄가 거기서 나온다. 여러분 안에 섬김이 있는가? 여러분의 신자로서 생활은, 섬김을 바탕으로 하는가? 섬김 하나로, 신앙의 진위가, 감별된다.

 

오늘 복음에서, “섬기다”란 단어는, διακονέω, 이 말에서, 식탁의 봉사자, deacon(dí:kən, 부제)이란 교회직이 파생되었다. 일반적으로, serve로 번역된다. “봉사하다, 시중들다, 복무하다, 식탁봉사(복사일)하다”. (말장난) 하느님과 예수님이 우리에게 serve하니, 그게 우리에게는 save 구원이 된다. 우리도 그분께 serve하고, 그분 닮아, 누군가 이웃에게 serve하니, 그로 인해 그를 save, 살리고, 나 자신을 save, 살리는 것이다. 봉사는 그래서, 살리는 일, 살림, 곧 구원의 일이다.

 

누군가의 섬김, 누군가의 봉사를 접할 때, 여러분은, 그걸 바로 포착해, “감사합니다”하는가? 이거 쉽게 놓치는 사람, 상대를 종처럼 대하기 쉬운 사람이다. 감사할 줄 알아야, 그래야, 나도 그 사람처럼, 그에게, 혹은 다른 사람에게 섬기는 일을, 해내려 한다. 섬김이 눈에 안 뜨이면, 그저 섬김받으려고만 한다. 그저 당연하듯, 그게 마땅하듯, 자신이 마치 섬김받기 위해 태어난 꼰대가 돼버린다. 살리는 일, 살림은 안 하고, 남한테 미루거나, 여자의 일이라 못 박는 인간이, 사람 위에, 군림하는 자 아닌가? 하느님도 인간에게 봉사하셨는데,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봉사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망나니 아닌가?

 

오늘 복음은, 저에게도 해당된다. 저도 하느님을 섬기듯, 신자를 섬기는 사람, 그가 사제이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그리고 제가 이곳 랄리에 파견된 지, 약 6개월을 맞아, 제가 이곳에서, 보고 듣고, 묵상했던 바, 이곳에서 저의 소명, 부르심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한다. 그 기저엔, 항상 저의 섬김이 있다. 저는, 섬김받으려, 이곳에 오지 않았다. 예컨대, 저에게 골프 접대, 애써 해주지 않아도 된다.

 

여러분도 느낄 것이다. 코로나 이전과 이후, 이 세상은, 엄청난 물적 정신적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대충 짐작할 것이다. 이 랄리 본당에도, 이전과는 다른, 신앙 모습과 방법의 변화가 분명 있을 것이다. 원치 않아도, 바뀌어야 한다. 우리 스스로도 달라져야 한다. 대비해야 한다. (이제부터 여러분과 나눌, 제 생각과 계획은, 저 나름의 것이다. 물론, 부족하다. 전 예언자도 아니다. 단순화, 일반화해서 말할 뿐이다. 미리 양해를 구한다.)

 

코로나 이전에, 랄리 성당은, 아마도, 주일미사와 더불어, 식사, 친목 행사 중심의 신앙생활이었을 것이다. 토요일 미사 후, 아이들이, / 주일 미사 후, 대부분의 신자들이 모여, 먹고 마시며,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분명 필요하다) 2차 주회를 열며, 공동체 생활을 꾸려왔을 것이다. 헌데 여기서, 식사에 참여하느냐, 불참하느냐, / 주방에서 봉사하느냐, 봉사에 소홀하느냐, 그 기준으로 사람이 나뉘고, 신앙 정도가 갈렸을 것이다. 분명, 공동체 화합을 위해, 식사가 필요했다. 그러나 코로나를 거치면서, 이제는, 그 단점과 한계가 느껴진다. 아직도 여전히, 그때 식사를 그리워 는가? 막상 코로나 종식되고, 식사 봉사하라면 안 할겁니다. 한달에 한 번정도 할까? (코로나로, 형식은 빠지고, 진정 핵심을 찾고 있는 것이다)

 

성당이란 건물/조직 안에서, 함께 무리 지어, 신앙/친교 생활을 하다가, 이제 ‘혼자 신앙생활’, 그리고 ‘가족과 함께만 신앙생활’하니, 우리 모두는 신앙 위기까지 절감하고 있다. 전에는 미사 안 나가고 성당 식사 안 하면, 냉담자가 됐다. 하지만 이젠, 여러분도 느끼듯, 기도 없으면, 냉담자다. 특히 아침-저녁기도 없고, 식사 전후 기도만 안 해도, 냉담자 다를 바 없다. / 이제는 미사방송도 재미없다. 하느님 없이 사는 게, 너무 쉬워졌다. 코로나가 나를 냉담자로 만들었나? 아니다. 내가 문제였다. 내 신앙이 잘못되었다.

 

코로나 덕분에, 나에게, / 우리에게 꼭 필요한 신앙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된다. 미사에는, 성찬의 전례가 있다. 그런데, 말씀의 전례가, 반드시 앞에 붙는다. 말씀 없이, 그저 빵만 먹으면, 욕심만 늘 뿐이다. 말씀이 있어야, 빵이, 나를 살리는, 생명의 양식이 된다. 또 누군가를 살리는 봉사/섬김의 양식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고 익혀야 한다. 말씀을 먹어야, 빵을 제대로 먹고, 제대로, 살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랄리 성당이, 아니, 더 나아가, 오늘날 대부분의 성당이, 간과하고 놓쳤던 바, 그래서 회개하고 되찾아야 할 바가, 바로 이것이다. 이제껏, ‘함께 신앙’, ‘행사 신앙’, 그 뒤에 숨어, ‘홀로 신앙’, ‘가족 신앙’에, 소홀했다. 그 가치를 잘 몰랐다. (물론 단체 신앙은 있어왔다. 레지오가 대표적. 그러나, 그들이 더 심하게, 똑같은 고민에 고생하고 있을 것이다. 모든 활동을 잃어버리고, 오로지 묵주만 남으니, 정체성이 사정없이 흔들렸을 것이다. 레지오는, 지금, 자신들의 교본을 연구해야 한다. 코로나 이후, 자기들이 이제껏 습관처럼 해왔던 봉사를 넘어서야 할 것이다. 코로나 이후, 이 세상에 만연한, 더 큰 무기력과 상대하기 전에, 자기들의 무기력부터 대면해야 할 것이다.)

 

다시, 홀로 신앙, 가족 신앙... 이제껏 무난하게 해왔던 일상적인 성당생활, 얘들 성당 보내고, 부모도 성당 가는 것으로, 신앙생활해왔던 것을 뒤엎어, 부모가 한 가족의 사제가 되고, 자기 가정을 성전으로 가꿀 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각자도, 혼자, 스스로, 자기 자신의 사제가 되고, 자기 몸과 자기 머문 곳을, 거룩한 장소, 성전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 내 스스로, 나를 기도하도록 이끄는, 사제가, 될 줄 알아야 한다.

 

제가 이곳 랄리 성당에서, 사제로서 해야할 제 역할, 제 섬김법이, 이제 드러난다. 바로 신앙 교육이다. 성당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교육은, 잠시도 쉬어서는 안된다. 배우기를 멈추면, (신앙적으로) 회개를 멈추면, 그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다. 나아가, 자신도 죽고, 주변 사람도 죽이는 사람이 된다. 그 중에 가장 먼저, 주일학교 아이들의 한국어 교육, 한국 문화 교육, 신앙 교육이, 저의 할 일이다. 물론 교사의 지원과 도움이 절실하다.

 

(찬찬히 보니, 이곳 아이들은, 첫영성체 준비 때 빼고는, 한국어 복음서를 접할 기회가 너무나 적다. 그저 미사 중에? 그것도 한국어 못하는 아이들이 태반이니, 참 난감하다. 그 아이들이, 과연 어릴 때, 영어 복음서는 읽을까? 부모도 안보는 영어 성경을, 그네들이 읽어줄까? 잘못하면, 아이들을 냉담자로 만드는 양성소가 될 것 같다. 언어 장벽에 탓을 돌리며, 아이들을, 신앙 문맹자로 내버려 두는 꼴이다.

 

이번에, 본당 한국학교 교감선생님의 중재로, 아틀란타 한인성당 교장 선생님과 연락되었다. 교사 재교육을 하여, 우리도, 본격적인 한국어학당으로 나아가는 첫발을 내딛고 있다. 근데, 교사들이 힘드나 보다. 새로이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으니까, 다들 불편하고 귀찮을 것이다. (제 역할은, 자겠다는 사람 깨우고, 쉬겠다는 사람, 눕겠다는 사람, 일으켜 세우는, 못된 역할. 사목자의 역할) 기도 부탁드립니다. 우리 본당 아이들의 신앙을 위해서, 그리고, 먼저, 우리 본당 교사 선생님의 실력과 신앙 성숙을 위해서, 많은 관심, 지원 부탁드린다.

 

여기 랄리 성당에 도착한 후에, “본당25주년” 기념 책자를 읽었다. 2012년, 이철호 암브로시오 신부님과 지청룡 바오로 형제님이 주도하여 만든, 그 책을 읽고, 여러분들의 원의, 바람을 알게 되었다. “시니어 대학!” 헌데, 내년 2022년은, 그때 이후 10년을 더한, 35주년 해이다. 강산이 변했는데, 여러분 공동체는 어떠한가? 시니어 대학을 위해, 첫삽은 떴나? 시니어 대학에서 봉사할 일꾼들은 있나? 일꾼들을 양성해 놓아야 하지 않나?

 

가장 먼저, 아이들의 한국학교부터 자리잡혀야 한다. 그네들에게 한국문화교육을 줄 수 있는 교사가 많이 생기면, 그 인력으로, 시니어 교육은 너무나 쉽게 된다. 시니어 대학을 위해 필요한 거, 바로 여러분 모두의 섬김이다. 여러분 모두가, 이 성당 공동체에 섬김을 실천하기를, 특히 아이들에게, 섬기는 일을 멈추지 말기를 빈다. 온 마을이 아이들을 챙겨주면, 마을 전체가 풍요로워진다.

 

여러분 모두, 아이부터 어르신 모두, 섬김을 멈추지 말기를 빈다. 섬김을 멈추는 공동체는, 서로 섬김받고자 싸우는 공동체밖에 안된다. 성김 없다고 투정하다, 같이 망하고 만다. 특별히, 이곳 성당 모든 분들이, 아이들의 신앙 교육에, 모두 관심갖고, 아이들을 섬기는 일에 소홀하지 않기를 빈다. 우리가 그들을, 신앙으로 섬기지 않으면, 그들은, 이곳 성당에서, 섬기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곳 성당에서, 우리끼리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며 지내기만 한다면, 그들은 결코 이곳 성당에 오지도, 머물지도 않을 것이다. 부모도, 이 공동체도, 신앙으로 섬기려 하지 않을 것이다. 섬김 없는 공동체는, 그래서 불행하다.

   

 

 

1. 기회되면, 신앙특강, 시기별로, 다양한 주제로, 나눌까 한다.

2. 올해 서울교구에서, 예비자 교리서를, 대폭 개편하였다. 예비자 새 식구 양성할 봉사자 교육도, 제 역할이다. 혹시나 가톨릭 교리와 교리교육에 관심있는 분들, 추천해 주시길...

3. 35주년을 맞이해, 우리 공동체 안에 성소자를 위한 기도를 부탁드린다. 사제도, 종신부제도, 하느님이 우리 공동체에 보내주시기를, 기도로, 청해야 한다. (한 공동체 안에, 모든 신자가, 사제의 맘과 덕을 지니면, 사제가 나온다. [엣말에, “3대가 기도해야, 사제가 나온다”] 그리고, 신자 모두가, 부제 역할을 할 줄 알면, 부제가 나온다)

 

죄송합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서툴러 실수가 많습니다.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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