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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 신부님 교중 미사의 짧은 강론 버전 입니다.

연중 제24주일 B Mk 8,27-35 십자가 고통

 

코로나 상황에 미사를 직접 참석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하여, 부족하지만, 강론을 함께 나눕니다.

당일 강론과 약간 다를 수 있습니다. 상황에 맞춰 첨삭을 했고, 또한 추후 보완했습니다. 

부족한 강론입니다. 저를 위해 기도 부탁드립니다.

 

우리 인간은, 고통을 싫어한다. 상처 하나 받는 것도, 우린 좋아하지 않는다. 제발 좋은 날만 있기를, 제발 꽃길만 내 앞에 펼쳐지기를... 그런데 현실은, 내 맘처럼, 그리 돌아가지는 않는다. 누군가 말했다. 만일, 매일 화창한 날씨에, 햇빛 내리쬐는 곳이 있다면, 거긴 아마 사막일 것이라고... 우리가 사는 땅엔 햇빛도 필요하고, 먹구름, 강풍, 비도 필요하다. 마치 바이오 리듬, 생체리듬과 비슷하다. 변화하는 게 정상이고, 살아있는 건 다, 생로병사, 변해야 한다.

 

여러분은, 고난, 고통, 시련, 환난이 닥쳤을 때, 어떤 생각, 어떤 반응을 하는가? 이제껏, 아무 문제 없이, 잘 살아왔는데, 어느 순간 상황이 안 좋을 때, / 사건 사고가 생기고, 병을 얻거나 생명의 위협을 받을 때, / 꼭 커다란 위험이 아니더라도, 자잘한 감정 기복, 기분의 변화도, 시련이 될 수 있다. 분노와 짜증도, 우울과 불안도, 걱정과 근심도, 다 고통이다.

 

고통 없이, 나는 늘 평화롭고 싶다. 그런데, 내가 바라는 평화는, 늘 깨지고 만다. 왜? 우리 인간은, 사는 게 고통이다. (할머니 말, “사는 게 죄죠”와 비슷한 이치?) 어릴 적, 사춘기도, 성장통도, 해산도, 갱년기도, 인간의 중요한 순간마다, 고통이 함께한다. 우리는 착각한다. 원래 고통이 하나도 없어야 하는데, 갑자기 고통이 생기는 것 아니냐고.. 아니다. 원래 우리는 고통 속에 살고, 그 속에서도 기쁨을 만들어내고, 행복을 일구는 것이다. 죽음이 인간 옆에 있듯이, 고통도 늘 우리 바로 옆에 있다. 그게 정상이다. (지금의 with corona처럼, with suffering)

 

(다시 돌아가) 우리는 고통을 어떻게 대하나? 제가, 어릴 때 가졌던 생각이 있다. "내가 뭘 잘못한 건 아닌가? 내가 죄를 지어, 혹시나 벌 받고 있는 건 아닌가?"이다. "내가 하느님 길을 벗어나 살아서, 혹은, 내가 악마의 유혹에 빠져서, 지금의 환난이 생긴 건 아닐까?” 유치하죠? 그런데, 저는 이런 죄의식을, 지금도 좋게 사용한다.

 

물론, 단순히 죄책감, 죄나 벌은, 기분이 썩 좋지 않다. 괜히 주눅 들게 하고, 무서워지고, 점 보러 가고 싶은 감정이다. 근데, 회개의 마음은, 적극 추천이다. 내 일상생활을 점검해 보고, 그 속에서 잘못된 습관을 찾고 바로잡으려 한다. 마치 체중이 늘면, 내 식습관을 다시 되짚어 보는 식이다. 내가 소홀했던 건 없는지, 내가 게을렀다 건 없는지, 다시 내 생활을 청소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것, 그게 회개 아닌가?

 

그런데, 나이가 들면, 고통 앞에서, 잘못된 길을 택한다. “내 탓”을 점검하기보다, “남 탓”으로 쉽게 돌려 버린다. “저 인간 때문에, 저 인간과 만나지 않았다면, 내가 이러지 않을텐데...” 문제는, 남 탓이 습관이 될 때이다. 나는 잘했는데, 남이 날 괴롭힌 거다. 나도 실수할 수 있는데, 저 사람이 날 용서해 주지 않은 거다. 저 사람이 가만히 있는 나에게, 불을 지른 것이다. 저 사람 때문에, 내 평화가 깨진 것이다. 내 기쁨과 행복이 날라가 버린 것이다.

 

“나는 희생자요, 피해자입니다!” 이 억울하고 분하고 야속한 마음으로, 고해소를 찾는 이들이, 참 많다. 이들 고백은, 지금 남의 죄 때문에, 내 생활이, 내 감정이 어떤지, 하소연이 주요 내용이다. “남편이 바람을 펴서, 내 생활이 지옥이 되었어요. 내 자녀가, 내 말을 안 들어서 싸웠어요, 내 자녀가 나이 든 나에게 전화 하나 주지않아요” 남의 죄를 고하고는, 그래서, “섭섭했어요, 서운했어요, 괴씸해요, 속상해요” 자기 감정의 앙금과 자기 죄를 구분 못하고 혼동하는 것이다. (진짜 악랄한 사람은, “그래서 안타까웠어요” 이건 또 뭘까? 자기가 자비로운 척한다. 자기 죄를 고백하라고 했더니, 자기의 자비를 자랑질한다.)

 

그냥 “미워했어요” 하면 될 것을, 그렇게 말을 못하는 것이다. 왜? 저 사람의 죄가 더 크니까... 나는 저 사람 때문에 상처입은 거니, 나는 죄가 없지는 않아도, 그렇다고 큰 것도 아니니까... 내 마음 속 이 울분과 고통은, 저 사람 탓이라고, 고해소에서,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저 사람을 미워하는 건 당연하니까, 나의 미움은, 죄가 아니라고 믿고 있는 거다. 그래서, “미워했어요”라고, 죄 고백을 못하는 것이다. 미움에 떳떳한 것이다.

 

미움의 감정, 이건 현대인의 고질병이다. 미움을 잘 다루지 않으면, 화병에 휩싸인다. (나중에 미움에 대해 좀 더 얘기하겠다) 미운 감정이 고통인 건 맞다. 하지만, 미워하기만 하니, 미움을 놓치 않으니, 미워하는 데 익숙해지니, 고통이 되는 것 아닐까? 미움을 떨칠 궁리, 곧 회개하기보다, 그냥 미움 속에 눌러 살려고 하니,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미운 사람, 천지이다. 내 마음에 안 드는 사람, 나를 무시하고 차별하고 홀대하는 사람 천지다. 그래서 미워하기만 하면, 나만 손해이고, 나만 고통 아닌가? 특히, 배우자가, 내 자녀나 부모가, 내 친한 친구가 미워지면, 인생 쫑난다. 이생망, 이번 생은 망했다. 누군가 말한다. “이 세상에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 분명히 있다고... 나를 싫어하는 사람, 있다고... 모두 다 나를 좋아하기를 바란다면, 나만 불행해진다고...” 맞는 말이다.

 

또 하나, 저에게 인생 원칙이 하나 있다. (Sie sind sehr unhöflich) "남이 나에게 악하게 대했어도, 나는 악으로 응대하지 않기, 남이 나에게 무례히 대했어도, 나도, 나까지 무례해지지 않기. 어떤 순간에도, 어떤 사람에게도, 선을 놓치지 않기." 저는 이 원칙으로 도움을 많이 받는다. 애써 미움을 선택하지 않는다. 내 갈 길, 하느님께 향하는 길을 멈추지 않게 한다.

 

(다시 돌아가서) 환난 앞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좋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자세가 가장 좋은 방법이다. 수난? 죽음? 두렵다, 하지만, 하느님이 함께 하시는 자리는, 아무리 그곳이 십자가, 그 위라도, 다 좋은 곳이 된다. 그곳은 나에게도, 세상에도, 구원의 자리가 된다. 우리 신앙인은, 십자가를 방에 걸어 놓는다. 마을 중심에 성당을 짓고, 십자가를 세워 어디서든 바라보도록 한다. 왜 우리는 묵주기도할 때, 십자가에 친구(입맞춤)하고, 기도 시작할 때, 십자 성호를 그을까?

 

내 삶, 그 고통의 삶에, 하느님을 모시기 위해서이다. 이 믿음이, 우리가 십자가를 곁에 두는 이유이다. 고통? 그 고통 속에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그건 구원이 된다. 그것 아는가? 원래부터, 고통이 있는 자리는, 하느님이 없는 곳이다. 지옥에는 하느님이 없는 것처럼, 악이 넘쳐나는 곳에, 고통이 많은 이유이다. 하느님을 몰아낸 곳,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 곳은, 그래서, 다 고통의 현장이 된다.

 

오늘날, 인간이 고통을 만든다. 자기가 바라는 것만 찾으니, 고통이 넘쳐난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은, 고통의 현장을 일구고 경작한다. 그곳 또한 하느님을 모시고, 하느님을 섬기는 곳으로 만들려고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선택하고, 십자가 위에서도 하느님께 기도한 이유이다. 우리에게 고통은, 사탄이 될 수도 있고,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있는 자리이다. 남 탓하며, 이를 갈고 분노하는 미움의 현장이 될 수도 있고,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의 구원을 기대하며, 용서와 사랑을 나누는 자리도 될 수 있다.

 

고통 앞에서, 내가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지옥과 천국이 갈린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베드로에게 한 이 말은, 우리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고통을 앞에 두고, 하느님이 바라시는 일을 찾고 행하느냐, 사람이 바라는 일을 찾고 행하느냐,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부록) 한 번 성찰해 보기를 빈다. 우리는 참으로 엉뚱한 걸 환난이요 고통이라 여기지 않는가? 우리는 쉽게 기도를, 미사를, 고해성사를, 나를 괴롭히는 걸로, 내 생활을 방해하는 걸로, 그걸 환난처럼, 대하지 않는가?

 

 죄송합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서툴러 실수가 많습니다.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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