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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당주보입니다.

랄리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 

ST. HA-SANG PAUL JUNG CATHOLIC CHURCH 

주임신부: 이동욱 (도마)  

3031 Holland Rd Apex, NC 27502      Tel: (919) 363-0408      Fax: (919) 363-0409

제1독서  사도  5,12-16

화답송

◎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 이스라엘은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아론의 집안은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
○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주님이 이루신 일우리 눈에는 놀랍기만 하네.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
○ 주님,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주님, 번영을 이루어 주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는 복되어라. 우리는 주님의 집에서 너희에게 축복하노라. 주님은 하느님 우리를 비추시네. ◎

제2독서  묵시 1,9-11ㄴ.12-13.17-19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토마스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복음  요한 .20,19-31

영성체송    

네 손을 넣어 못 자국을 확인해 보아라.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알렐루야.

 

                       ~   부활을 축하 드립니다   ~


 생명의 말씀  

          상처는 결코 마지막이 아닙니다

                    

               정수용 이냐시오 신부 | 가톨릭평화방송 · 평화신문 보도주간

 

너무나 사랑하고 존경했던 스승님이 억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것도 우리와 함께했던 동지 가운데서 배신자가 나왔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 스승님을 보고 환호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이렇게 손쓸

겨를도 없이 일이 진행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순식간에 체포되셨고, 재판과 형 집행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율법을 잘 안다는 이유로 거들먹거리고 성전의 이권을 챙기며

떵떵거리고 사는데, 스승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했다는 이유로

그렇게 끔찍한 십자가형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 제자들도 갑자기 겁을 먹었습니다.

 

이제 다음 차례로 우리까지 잡혀가는 것은 아닌지….

언제 소환장이 날아오고, 조사를 받고, 고문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잠가 놓고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앞에 스승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분명 지난 삼 년간 따라다니며 함께

지냈던 그 스승님이 분명합니다.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의 상처도 보여주십니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너무나 반가웠고,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가슴에 가득했습니다.

마침 그날, 우리 동지 중 하나인 토마스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못 자국이 선명한 스승님이었다고 전해주었지만, 토마스는 우리가 주님을

뵈었다는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의 못 자국을 직접 보고 만져보아야 믿을 수 있겠다 합니다.

 

하긴, 다시 살아오신 스승님을 직접 보고도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은데, 그 자리에

없었던 토마스의 반응도 이해는 갑니다.

그 일이 있고 여드레 뒤, 우리는 아직도 두려운 마음이 들어 집안 문을 모두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스승님이 나타나셨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그분은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정한 눈빛으로 토마스에게도 다가가셨습니다.

어리둥절해 하는 토마스에게 당신의 못 자국을 보여주시고, 옆구리의 상처도 만지게 해주십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토마스도 눈물을 흘리며 스승님을 향해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분의 상처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상처는 우리를 두렵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사실 스승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만 빼고, 저 문밖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끝까지 뻔뻔하게 거짓말하는 율법 학자들과 사제들은 십자가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부활하셨고, 우리에게 당신 상처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역시 그 상처를 보고 만져보았지만, 이젠 무섭지 않습니다.

상처는 십자가의 결과지만, 그것이 끝이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잠갔던 저 문을 열고 얼른 나가야겠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을 것을 빨리 사람들에게 전해야겠습니다.

특별히, 지금 스승님처럼 상처 입은 사람들을 만나러 달려가야겠습니다.

그 상처가 끝이 아니라고 선포해야 하겠습니다.

 

 

msn035.gif  [생활속의 복음]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함승수 신부(서울대교구 수색본당 부주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동료 사도들이 토마스에게 전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그런데 토마스는 증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로 인해 ‘불신의 대명사’가 됩니다.

그리스도교는 근본적으로 보고 나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보게 되는 종교인데

그 부분을 간과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토마스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사실 자체를 불신한 게 아니라, 주님께 대한

신앙이 나와 상관없는 남의 신앙이 되어 메말라가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보았으니까 나도 당연히 본 것이 되거나, 다른 사람들이 믿으니까

나도 믿어야 하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신앙이란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드리는 투신이기에 ‘남의 신앙’으로 대신할 수도,

만족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상처에 자기 손을 직접 넣어봐야만 믿겠다는, 조금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됩니다.

 

토마스가 동료들에게 어깃장을 놓은 것은 자기는 주님의 부활을 절대 믿지 않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듯, 믿음의 반대말 역시 불신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믿고 싶지 않다면 그냥 관심을 끊고 멀어지면 그만입니다.

굳이 동료들과 불화를 조장하고, 진짜 예수님을 만나면 죄송할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이유가 없지요.

 

토마스가 강한 어조로 말한 것은 “나는 믿고 싶다”는 강한 의지와 희망의 표현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예수님이 부활하시기를 바랐고, 부활하신 그분을 만나뵙기를 고대했던 겁니다.

그의 마음을 잘 아셨기에, 예수님은 온전히 그를 위해 다시 나타나기를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사랑은 조건을 내걸고 버티는 기 싸움이 아니라, 어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자비임을 몸소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자들 앞에 다시 나타난 예수님은 토마스에게 기꺼이 당신 상처를 내보이십니다.

그가 자기 손으로 직접 그 상처를 만져봄으로써 당신의 사랑을 의심하는 마음을

극복하도록 배려하신 것이지요.

다른 제자들 앞에서 자기가 했던 말을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인용하여 말씀하시니,

토마스는 많이 놀랐을 겁니다.

질투와 불신이 눈을 가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 그분은 거기 계셨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언제나 함께 계심을 분명히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토마스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보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사실 확인’에 불과함을, 주님의 사랑을 느끼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의심이 아니라 믿음임을,

주님께서는 의혹과 불신에도 언제나 자신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계심을…. 그러자

자기도 모르게 주님께 대한 절절한 사랑 고백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는 토마스의 불신을 질책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기쁨은 지극히 제한적이고 일시적이기에 거기에

안주하지 말고, 주님 부활의 그 기쁨을 가슴에 간직한 채 ‘보지 않고도 믿는’, 즉

참된 믿음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볼 수 있는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야

함을 강조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신앙의 여정을 걷는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은 주님의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하는

오늘날의 ‘모든 신앙인’에게 하시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 이어져 온 신앙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그 신앙의

힘으로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모두가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분명한 ‘행복선언’입니다.

         

msn036.gif [말씀묵상]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 사랑의 절정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살레시오회)

 

마티아 프레티 ‘의심하는 토마스’ (1656~1660년).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할 것입니다.

토마스 사도가 자신의 손가락을 구멍 뚫린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넣어봤다는

표현은 없지만, 그의 성격상 끝까지 세심하게 확인해봤을 것입니다.

아마도 자신의 손가락을 구멍 뚫린 그분의 옆구리에 직접 넣어봤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이런 신앙 고백을 하게 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 28) 토마스의 늦었지만 장엄한 신앙 고백 앞에

예수님께서는 각별한 말씀 한마디를 덧붙이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 29)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너무나도 특별한 사건이었기에 당시 이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초대교회 공동체에 주어졌던 가장 큰 과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부활 사건은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전대미문의 대사건이었기에,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제자들 역시 부활 사건 앞에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이 참되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십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말을 걸어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돌아가시기 전과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똑같은 자상한 얼굴로 불안과 공포에 떠는 우리를 안심시키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지니고 계신 절대불변의 속성, 극진한 사랑을 먼저 제자들에게

보여주심을 통해 당신의 부활이 참됨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신과 의혹으로 가득 찬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는 극적인 방법을 선택하십니다.

두 번 다시 보기조차 싫은 십자가의 상흔, 손과 발에 뚫린 대못 구멍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극진한 노력 앞에 제자들은 의혹의 시선을 거두어들입니다.

스승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 앞에 너무나 기뻐 어쩔 줄 모릅니다.

우리들의 나약한 신앙을 굳게 하시려고, 흔들리는 우리의 믿음을 붙들어주시려고

당신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시는 부활 예수님이십니다.

머리로만, 지성으로만, 논리로만 모든 것을 파악하려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신비는

항상 베일에 가려져 있기 마련입니다.

진정으로 부활을 믿고, 느끼고,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매일 매 순간이 부활일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절정인 예수님의 부활

의심 많은 토마스 사도의 회심, 믿음의 회복 스토리는 초대교회 때부터 오늘날까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을 교육하기 위한 교과서이자 지침 역할을 해왔습니다.

사실 토마스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3년 세월 동안 그분과 동고동락해왔으며, 여러 차례

당신 죽음과 부활에 대한 가르침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교육받았습니다.

그런 제자조차도 의심했던 것을 봐서, 초대교회의 수많은 그리스도 신자들도

부활에 대한 의혹이 컸던 것이 자명합니다.

오늘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랜 기간 고민하고, 예비자 교리에 등록하고,

마침내 그리스도 신자로서 새로운 출발을 한 신자들, 그리고 신앙의 연륜이

깊은 교우들에게, 부활 사건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있는가 물었을 때, 많은 사람이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사실 부활은 교회 수많은 축일 가운데 가장 등급이 높은 대축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 그리스도교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부활 없이 그리스도교는 없습니다.

부활 없이 영원한 생명도 없습니다.

부활 없이 구원도, 하느님 나라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이토록 그분의 부활은 그리스도교의 핵심 진리이자 진수가 되는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 신앙의 초석인 부활 사건 앞에 별 감흥이 없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활,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데?’ 라고 합니다.

부활 사건 앞에 밋밋한 사람들, 심드렁한 사람들, 대체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타성에 빠진 신앙생활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 뼈를 깎는 쇄신 작업이 필요한데, 그러한 고통스런 과정을 외면해서 그렇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도 부활이란 당신 인생의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십자가 죽음이란 고통스런

과정을 거치셔야 했습니다.

정말 가고 싶지 않은 십자가 길을 끝까지 인내하며 순명하며 걸어간 그 결과가

영광스런 부활이었습니다.

결국 십자가 없이 부활의 참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

고통과 시련의 극복 없이 부활의 영광은 없습니다.

주변을 가만히 살펴보니 예수님 부활을 온몸으로 느끼고, 예수님 부활의 영광에 깊이

참여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매일 자신에게 주어지는 고통을 기쁘게 참아내는 사람들, 자신의 고통에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 시련이 다가올 때마다 그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분을 따라 매사에 극도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그분의 부활은 크게 다가올 것입니다.

매일 죽는 사람들, 특히 자신의 죄에서 죽고, 이기심에서 죽고, 교만한 마음에서 죽는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실 은총은 정말 클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 사랑의 절정은 곧 예수님의 부활로 표현됩니다.

만일 그분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아직도 죄와 어둠 속에 잠겨 있을 것입니다.

은혜롭게도 그분의 부활로 죽을 운명, 필멸(必滅)의 존재인 우리 역시 불사불멸의

존재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니 눈만 뜨면 감사드려야 하고, 백 번 천 번 감사드려야 할 은총의 대 사건이 바로 그분의 부활입니다.
 

 

 

  msn040.gif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가톨릭 신학]                   

   

            부활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조한규 베네딕토 신부 | 가톨릭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그리스도교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 계시, 신학 등이 많은데, 그중 ‘부활’은 가장

어려운 주제 중 하나입니다.

부활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증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제자들의 ‘증언’입니다.

부활의 첫 증인인 마리아 막달레나를 비롯해, 사도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루카 23장),

티베리아스 호숫가(요한 21장) 등 많이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러 가던 중 다마스커스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깊게

체험했던 사도 바오로(사도 9장) 역시 중요한 증인입니다.
 

부활의 두 번째 증거는 ‘빈 무덤’입니다.

당연히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이 부활의 충분한 증거가 될 수 없지만, 부활하셨다면

무덤은 비었어야만 합니다.

그저 빈 무덤이 부활의 증거는 아니지만, 무덤이 비었어야 부활을 상상할 수 있기에

부활의 전제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활 사건과 관련해 신앙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부활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아생전 당신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신 후 그분이 부활

하셨을 거라 기대나 예측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후 모두가 절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요한 20,1)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 무덤으로 찾아갔습니다.

예수님 시신이 사라진 것을 확인했고, 제자들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제자들이 빈 무덤을 확인한 후 다시 돌아갔는데, 마리아는 계속 무덤 근처에 머물렀습니다. 

무덤 밖에 서서 울던 마리아 뒤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는데, 그녀는 예수님이신 줄 몰랐지요.

 

아마도 부활하신 육신은 다른 얼굴과 몸, 다른 음성이나 모습인 것 같습니다.

그녀는 잠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지만 못 알아보다가 어느 순간, 즉 예수님께서 평소

그녀를 부르셨던 것처럼 “마리아야!”하고 부르셨을 때 예수님이심을 알아봅니다.
 

마리아는 왜 어두운 새벽에 예수님 무덤에 갔고, 왜 무덤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왜 ‘마리아야!’라고 불렀을 때 예수님을 알아봤을까요?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랑’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사람이었기에, 죽음 이후에도 예수님 곁에 머물렀습니다.

마리아 역시 예수님을 많이 사랑했기에, 그분의 외모와 음성은 달라졌지만 평소

그녀를 부르시던 모습을 기억하였고, 부활하신 분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부활은 하느님 사랑의 힘이고, 사랑은 부활을 알아보는 힘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부활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진 듯 보여도 사랑하는 사람은 믿을 수 있고, 희망할 수 있습니다.

믿음, 희망, 사랑은 항상 함께하는데, 그중에 제일이 사랑이라 하는 이유는 사랑은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 아닐까요?

 

가장 깊은 신비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있다면 믿고 희망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콜로 3,14)

 

 

 

msn036.gif 교황님 말씀 - 전쟁은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전쟁의 광기에서 이를 봅니다.

전쟁의 광기 바로 거기서, 그리스도께서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그렇습니다.

남편과 자녀의 부당한 죽음을 애도하는 어머니들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한번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그분께서는 팔에 아이들을 안고 포탄을 피해 달아나는 피란민들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그분께서는 홀로 죽어가도록 버림받은 노인들, 미래를 박탈당한 젊은이들,

자기 형제들을 죽이라고 파병된 군인들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거기서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2022년 4월 10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미사 강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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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체 소식        

* 본당 신부님 주중. 주일미사 강론은 홈페이지 '토막강론'에서 보실 수 있으십니다.

 

▣ 오늘 4월 24일은 부활 제 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입니다.

▣  제대 부활꽃 봉헌 받습니다.

▣ 교구청에서 2차헌금 요청이 아래와 같이 있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닌다.

  • 4월24일 (하느님의 자비주일) - 가톨릭 가정선교 관심을 위해

▣ 한국학교와 주일학교가 5월 7일(토)에 종강 수업있습니다.

▣ 성모회에서 빈 김치병을 수집합니다. 큰병, 작은병 뚜껑이 없어도 괞찮으시다고 합니다.  

▣ 2022년  5월 매일미사책이 도착했습니다.

정기구독 하시는 분들은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매월 각권은 $7 이며, 정기 구독료는  신청 개웙 x $7 하시면 됩니다.

신청하시는 방법은 아래 봉헌금내시듯 여러방법으로 신청하시면 되겠습니다.    

▣ 2022년도 BAA(Bishop's Annual Appeal)   

1. 교구청에서 우편으로 BAA를 받으신 분은 용지에 기재하셔서 직접 우편발송 하셔고 되고

2. 성당에 나오시는 분은 BAA 봉투를 봉헌함에 봉헌 (빈 봉투 성당에 비치)

3. 체크로 보내시고자 하시는 분은 편영준 미카엘형제님께 우편발송

4. 또는 온라인으로 직접봉헌 - GivetoBAA.org (저희 본당 고유번호는 614 입니다)

 * BAA Tax 공제는 저희 본당과는 무관하고 교구청에서 직접 발송됩니다.

▣  Zarama 주교님께서 권한으로 COVID-19 동안 신자들은 주일 미사 참여 

의무를 면제 해주시고, 노인이나 기저질환 환자등 케어를 필요로 하는 분들은 

가급적 마스크 착용을 권장 하십니다.

▣  코로나19의 빠른 극복을 위해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기를 

바라며, 성당내의 부엌사용과 모임을 자제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  성전안에서 미사 전, 미사 후 잡담을 삼가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시는분들을 위하여 성전밖으로 나가셔서 대화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  알림: 본 성당주보에 교우들과 함께 나누고싶으신 글이나 알리고싶으신 글 있으시면 언제나 보내주십시요. 

보내실곳은 성당 총무부 방정모 요한형제님( johnbang74@gmail.com)께 접수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단, 특정 이슈가 되는 글은 편집 삼가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교무금, 건축헌금, 주일헌금 등 봉헌금은 미리 준비하셔서 성당 입구에서만 수합 합니다.  

단, 미사예물은 미사 전에 직접 제대에 올려 주십시요.

▣ COVID19으로 본당 미사에 직접 참여를 못 하시는 분들께서는 교무금, 건축헌금, 주일헌금 등     

앞으로는 세가지중에 편하신 방법으로 알아서 결정 하시면 되겠습니다.

    1. 미사 참여시 직접 전달

    2. 우편이용 봉헌 -  체크를 본당 재무분과장 편영준 미카엘형제님께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Pay to the order of : SPJCC (주소는 각구역장님께 문의)

    3. 인터넷이용 봉헌 - https://spjcc.weshareonline.org  

현재 교무금, 건축헌금, 감사헌금 및 주일헌금을 봉헌하실 수 있으며 매달 원하시는 

주기로 자동결제되도록 예약하실 수도 있습니다

처음 봉헌하실 때 계좌를 만드시면 그 후로는 간단하게 사용하실 수 있으며 봉헌 내역도 

확인 가능합니다. 사용 문의사항은 재무분과로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봉헌하시는 교무금안에는 저희 성당건물 모기지는 포함 하지 않고 있습니다. 

세금혜택은 총 봉헌금으로 받으시기 때문에 건축헌금에 비중을 두시는것도 저희 건물 빚을 갚는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어렵고 불편한 환경에서도 봉헌금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  코로나19 이후로 봉헌하시는 체크는 경우에 따라 디파짓이 조금 늦어질 수 있음을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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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님의 4월 기도 지향}  

일반: 보건 의료 종사자들

특히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아픈 이들과 노인들에게 봉사하는 보건 의료 

종사자들이 정부와 지역 공동체의 적절한 지원을 받도록 기도합시다.

 

  * 미사 방송 보기    

 

1.가톨릭평화방송 매일 미사 시청   

    http://www.cpbc.co.kr/TV/178/  

    굿뉴스 가톨릭미디어 매일미사

    https://youtu.be/2UDDVdR0ru8 - 2022년 4월 24일 주일 부활 제2주일​

 

 

2. 미국 가톨릭 방송(EWTN)에서 매일 미사 시청   

     https://www.youtube.com/channel/UCijDos-LUTh9RQvSCMQqN6Q

     https://youtu.be/Fp8GUkZSjZo - Ntional Shrone April 24, 2022​

 

 

3. 랄리 주교좌성당 미사    

     Holy Name of Jesus You Tube Channel

     https://youtu.be/whcTySWutP8 - April 24, 2022​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마르(9장 24절)​

번호 제목 이름 세례명 날짜 조회 수
430 (녹) 연중 제21주일 2022년 8월 21일 AdelaKim Adela 2022.08.17 84
429 (백) 성모 승천 대축일 2022년 8월 14일 AdelaKim Adela 2022.08.11 122
428 (녹) 연중 제19주일 2022년 8월 7일 AdelaKim Adela 2022.08.03 88
427 (녹) 연중 제18주일 2022년 7월 31일 AdelaKim Adela 2022.07.27 78
426 (녹) 연중 제17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 2022년 7월 24일 AdelaKim Adela 2022.07.20 74
425 (녹) 연중 제16주일 2022년 7월 17일 AdelaKim Adela 2022.07.13 82
424 (녹) 연중 제15주일 2022년 7월 10일 AdelaKim Adela 2022.07.07 91
423 (녹) 연중 제14주일 2022년 7월 3일 AdelaKim Adela 2022.06.29 76
422 (녹)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2022년 6월 26일 AdelaKim Adela 2022.06.20 125
421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2022년 6월 19일 AdelaKim Adela 2022.06.16 123
420 (백)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2022년 6월 12일 AdelaKim Adela 2022.06.09 138
419 (홍) 성령 강림 대축일 2022년 6월 5일 AdelaKim Adela 2022.06.01 97
418 (백) 주님 승천 대축일 2022년 5월 29일 AdelaKim Adela 2022.05.25 111
417 (백) 부활 제6주일 2022년 5월 22일 AdelaKim Adela 2022.05.18 139
416 (백) 부활 제5주일 2022년 5월 15일 AdelaKim Adela 2022.05.11 104
415 (백)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2022년 5월 8일 AdelaKim Adela 2022.05.04 102
414 (백) 부활 제3주일(생명 주일) 2022년 5월 1일 AdelaKim Adela 2022.04.27 86
» (백)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 2022년 4월 24일 AdelaKim Adela 2022.04.20 113
412 (백) 주님 부활 대축일 낮 미사 2022년 4월 17일 AdelaKim Adela 2022.04.13 173
411 (홍) 주님 수난 성지 주일 2022년 4월 10일 AdelaKim Adela 2022.04.06 169